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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JHEY Oct 30. 2022

배웅

외갓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전부 행복한 기억들 뿐이다.


집 안에 있던 운동장 만한 과수원과 그곳에서 멋대로 뛰놀던 나와 동생들


소죽 쑤던 아궁이의 불 때는 냄새


한결같이 인자하시던, 그렇지만 말수는 없던 할아버지의 장난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모종 심던 일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누운 밤 논밭에 울리던 시골 개의 으스스한 울음소리


마당에서 경운기 타다 간장독 깨 먹었던 날, 태어나 처음 본 할머니의 화난 모습까지도.


그중 가장 소중한 기억은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날 웃고 울리던, 떠나는 우리 차를 따라오며 손 흔들던 외갓집 식구들의 배웅이다. 차가 길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흔들어주던 손들. 먼저 돌아서면 안 될 것 같아 덜컹대는 차 안에서 목을 돌려 나도 열심히 손짓으로 답을 했었다. 그러고 나면 어떤 뭉큰한 기분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 맴도는 것이었다.


올해 아흔이신 외할아버지는 병환으로 병원에 계신다. 엄마 말로는 얼굴도 까맣게 변하고 낮에도 자꾸만 눈을 감으신다고 한다.


"아부지, 잘 쉬고 계시소. 집에 갔다 얼른 또 올게예."


큰 딸이 병실을 나설 때면 움직일 힘도 없는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웃으며 배웅을 하신다.


"그래 걱정 말고 잘 가거래이"


할아버지에게 배웅은 분명 사랑한다는 말의 대신일 것이다. 그 배웅을 받으면 꼭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 때문이다.


외갓집 어귀에서 손 흔들어주던 건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너무나 그립지만 그러나 그 모습이 잊혀질까 슬프지는 않다. 매번 같은 미소로, 같은 동작으로 건넨 똑같은 배웅의 장면이 수십 년 치 내 기억 속에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 사랑해요. 조금만 더 힘내 아프지 마세요.


-


8월 20일


이 글을 메모장에 남기고 며칠 뒤 할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마지막까지 힘겨우셨던 할아버지가 이제는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기도한다. 멀다는 핑계로, 아이들 핑계로 할아버지를 만날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몹시도 후회한다.


늘 할아버지의 배웅만 받던 나는 마지막 가시는 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배웅을 드리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 이모, 삼촌, 고모할머니, 사촌동생들은 빈소 밖까지 따라 나와 먼저 나서는 나에게 배웅을 한다. 이미 한참 인사를 나누었건만, 아직 슬픔을 추스르지도 못했으면서 굳이 문 밖까지 따라 나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이 길고 따뜻한 작별 인사는 할아버지의 유산처럼 가족 모두에게 굳게 스며든 것 같다.


할아버지 긴 세월 고생 많으셨어요. 원 없이 행복한 생이셨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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