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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용희 Sep 29. 2018

APT 편

용희사전 17

APT(A름다움이 P어나는 Ter전)

     

나는 대학을 중퇴하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극심한 우울증 상태였다. 그리고 1년 후 나의 병은 조울증으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몇 년간 정신병원의 입원과 치료를 반복해야 했고 현재도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

     

그때 당시 나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세상이나 누가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무나 바보 같았고 미련하게 느껴졌었다.

     

나는 불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너무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나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우울했던 이유를 깊게 생각해보니 나의 행복의 기준이 나로부터 나오지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회가 바라고 타인들이 바라는 행복의 기준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를 생각하였다. 내가 행복하고 나의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우선은 우리 가족이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점점 행복의 범위가 커져나갔다.

     

그렇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그 행복을 공유하고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APT(A름다움이 P어나는 Ter전)를 꿈꾸게 되었다.  

  

오늘은 나의 이상인 APT(A름다움이 P어나는 Ter전 – 이하 APT)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APT는 아파트의 약자이기도 하다. 내가 APT의 이름을 정하게 된 것도 내가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생각해보면 아파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주거형태인데 굉장히 독립된 주거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에 변화에 따른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파트에 함께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대부분을 모른다.

     

그런데 나도 아파트에 사는 입장에서 이것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나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있어 굳이 불편하게 관계를 늘려가고 싶지는 않았었다.

     

예전에는 마을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마을은 함께 사는 운명 공동체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에는 예전같이 마을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사실 많은 부분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사는데 문제가 없게 점점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 살 수가 없다.

     

내가 우울 감을 느꼈을 당시 나는 나의 그러한 마음을 공유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쓸데없는 자존심이 나를 점점 병들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픔이 곪을 때까지 누구와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여 점점 병이 커졌다.

     

아니 사실 그래 봤던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던 것 같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현재 어디를 가도 아파트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함께 있는데 각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점점 감정이나 생각의 교류가 부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친한 지인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보다 더욱 넓게 할 수 있다면 삶이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달라 적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더 알맞은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터전이 누구나 행복하고 직업이나 직위, 또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인을 넘어 누구나 자연스럽게 행복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터전이 아름다움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의 터전이 아름답기만 하다고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APT는 그 터전 안에서 행복감. 안정감. 그리고 다양한 교류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야지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픔을 겪고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내가 말하는 APT 또한 나만의 기준이어서 누구에게 생각 없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을 맞추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행복을 펼쳐나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도덕적이고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행복의 기준이라면 그 행복의 기준에 100%로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그러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실 APT는 그러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연히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한데 이 기준을 넘어서거나 한참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은 똑똑 한 판단 일 수도 있지만 현명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나만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기준은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APT는 결국 사람 간의 공존을 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사람 안에서만 국한하고 싶지 않다.

     

APT는 결국 터전이다. 사람의 공존이 가장 우선시되지만 이것은 더 큰 그림을 위한 순서라고 생각한다.

     

지구인의 터전은 아직 까지는 지구이다.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터전이 건강해야만 한다.

     

APT는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APT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러한 세상을 꿈꾸고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다.

     

사실 내가 APT 편을 지금 쓰게 된 것은 얼마 전 친구의 죽음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내가 아무리 APT를 외친 들 나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친구를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다짐을 한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던 친구가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기로 말이다.

     

그곳에서 편안하기를 바라며 이번 글은 그 친구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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