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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나마스떼 Sep 29. 2024

불안이와 사바아사나를

나현

다능 선생님, 안녕하세요.


첫 만남에는 선생님의 요가 수업을 들었고, 두 번째 만남에는 식사를 했고, 세 번째에는 이렇게 편지를 받았네요. 다능 선생님과 저의 인연의 향방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선생님의 편지에는 제법 묵직한 질문이 딸려있어 일주일 내내 품고 다녔어요.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다시 다능 선생님의 편지를 열어봤는데...

아뿔싸! 질문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네요.


저는 편지 전반에 걸쳐 언급한 불안이 와닿아 그 불안과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생각했어요. 뭐, 약간의 오독이 있긴 하지만, 불안과 위로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감정과 같은 것이어서 불안과 잘 지내는 방법이 위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제 변호사가 된 지 10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판결 선고의 시간은 아무리 반복해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판결 선고를 앞둔 날에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처럼 ‘불안이’가 운전대를 잡는 시간이 이어지곤 해요. 소송의 결과를 섣불리 예상하기 힘들고, 판결이 저와 의뢰인이 원하는 내용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판결 선고 기일 전날에는 어김없이 불안이가 출몰합니다.     


저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보고 난 후 유독 잔상이 심해 며칠 동안 영상과 배경음악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거의 보지 않는데요.


최근 영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달성하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저도 관람을 했어요. 역시나 영화 관람 후 한동안 밤마다 혼령이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일까 봐 창밖을 내다보지 못했어요. 이렇게 제가 새가슴이네요!     


영화 속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혼령의 모습은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허깨비라고 생각하고, 만일 정말 나타나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면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제 안의 공포와 싸우는 시간을 보냈어요.      


영화 속 혼령은 실체가 없는 대상인데 저의 상상으로 점점 더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냈고, 그 괴물은 차츰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더라고요.


괴물이 다가올 때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떠올리면서 장면 전환을 하려고 해요. 시작은 영화였지만, 어느새 내가 만든 괴물이 훨씬 커져 버린 상황에서 그 생각을 중단하려고 전혀 다른 방면의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불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일어나지 않은 일을 혼자 상상하는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가슴을 두 방망이질 치게 하고, 침울한 마음을 가지게 하더라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은 실체가 없는 괴물과 같은 것이어서 계속 붙들려 있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저도 선생님처럼 요가를 접하면서 안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익히게 되었어요.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열심히 몸을 달궈 점차 피크 포즈(peak pose)에 이르다가 마지막에는 사바아사나로 수렴하는 요가 수련이 드라마의 기승전결과 닮아 한 편의 극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요.


‘오늘의 요가 수련’이라는 드라마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마지막은 늘 ‘사바아사나(송장 자세)’, 즉 죽음인 점이 요가 수련이 제게 주는 의미 중의 하나예요. 요가 수련을 통해 매번 죽음을 연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마스떼” 인사를 시작으로 몸을 점차 깨우면서 다양한 부분들을 자극하는 아사나를 할 때면, 아사나 동작 하나하나에 견디기 버거운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수월하게 넘어가기도 하는데요. 이때의 요가 매트는 알라딘의 양탄자가 되어 그 위에 선 제가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기분이랄까요.     


그러다 피크 포즈에 남은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그동안의 아사나를 거두어들이면서 사바아사나를 하면 요가매트는 관이 되어 저를 감싸 안는 느낌이 드는데요.


사바아사나의 시간이 5분에서 10분 남짓인데, 그 시간 동안 잠에 드는 것과 다르게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돌아오는 기분이 들어요.     


특히 지선 선생님이 사바아사나를 할 때 틀어주는 음악에 귀 기울이다 보면, 코끝으로는 해 질 녘의 바람이 불어오고, 머리맡에는 모닥불이 타면서 그 주위에서 이름 모를 여인이 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저는 요가 매트 아래로 펼쳐진 암흑의 공간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곤 해요.


이완된 온몸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느낌에 사바아사나가 끝나도 바로 깨어나지 않고 조금 멍하게 앉아 있을 때가 있어요.     




사바아사나를 통해 시간의 마디를 긋고, 요가 수련 후 두 번째 하루를 선사받게 돼요.


첫 번째 하루는 업무시간 동안 발생하는 산발적이고, 폭발적인 자극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잔뜩 곤두선 채 보냈다면, 두 번째 하루는 죽음을 연습한 직후의 차분함과 정돈된 모습으로 보내게 돼요. 그래서인지 두 번째 하루에 하는 일들은 능률이 쑥쑥 올라가더라고요.     


그리고 때때로 요가 수련 후 사무실에 와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곤 하는데요. 못다 한 일 중에는 종종 부검감정서를 해석하면서 소장을 쓰는 일도 포함되어 있을 때가 있어요.


첫 번째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19가 대유행하던 시절 저는 요가원을 가기 위해 자주 PCR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요. 그 때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던 사람들이 부작용으로 아프거나 사망한 사건들이 보였고, 코로나19 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코백회) 회원들의 소송을 돕게 되었어요.     


현재 진행 중인 소송 대다수는 코로나19 백신 이상반응으로 사망한 경우로 소장에는 망인의 부검감정서가 첨부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바아사나 후 마주하게 되는 부검감정서는, 연습했던 죽음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코 앞에 실재하는 것이라고 일깨워주는 고지서가 되어 좀 더 선명한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이 발생할 수 있는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저울 위에 무엇을 올려놓아야 괜찮을지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곧 휴정기 이후에 다시 출몰할 불안 이에게 도 사바아사나를 권하면서 잘 달래 볼 생각입니다.     


저의 허술한 위로가 다능 선생님에게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다능 선생님의 질문은 다시 지선 선생님께도 전달해 답을 받아보려고요.


지선 선생님,

요가를 통해 혹은

꼭 요가가 아니어도

어떠한 것들로 '나 이 자체로 충분하다.'며 위로받으신 적 있으세요?       




[그림 : 안나현 作, 사바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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