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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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건축이 미디어로 둥지를 튼 맥락에서 우리는 포멀리즘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을 연결 지어서 이해해야 현대 건축이 처한 상황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멀리즘은 무엇인가? 우선 포멀리즘은 건축만이 갖는 개념이 아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많은 사조들은 건축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줄기를 공유하되 다양한 맥락으로 변형되어 발전된다. 포멀리즘도 마찬가지다. 포멀리즘은 문학과 수학 등에서 먼저 출발한 개념이다. 건축에는 포멀리즘이 콜린 로우나 피터 아이젠만 등을 통해 조금 늦게 이식되었다.
포멀리즘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자율적인 형식체계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가장 좋은 예시는 수학에서의 ‘무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 역설은 현실에서 존재가 불가능한 ‘무한’이라는 개념이 사칙연산의 수학적 논리체계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후 수학에서는, 관념적인 성질 등으로 인해 현실에서 존재가 불가능한 개념이더라도, 해당 개념이 수학 내부의 자체적 논리체계에 들어맞으면 그 안에서 실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명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체계가 내부적인 일관성이 충분하다면 외부적 세계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실존한다. 이는 하나의 구체적인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그것은 모든 분야와 체계를 서로 상대화하여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플랫-온톨로지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된다.
이쯤에서 이 단어의 한국어 의미를 살펴보자. 사실 포멀리즘은 한국에서 ‘형식주의’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 굳이 포멀리즘으로 지칭한 것은 건축에서 형식주의라는 단어가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포멀리즘(formalism)은 form에 대한 ism이다. 다시 말해 폼(form)에 관한 것이다. 건축에서 이 단어는 주로 형태를 지칭할 때 쓰이는데, 이 것은 한국어의 ‘형태’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Form은 형태와 형식을 둘 다 포함한다. 따라서 이 단어의 뉘앙스는 ‘내부적 질서를 담고 있는 (관념적) 형태’에 가깝다. 그래서 이는 형태이기도 하지만 형식이기도 하고, shape(형태, 모양)과는 의미가 다르며, formula(공식)라는 단어와는 오히려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form의 형태적 의미는 타 분야에 비해 건축에서 유독 많이 쓰인다. 따라서 포멀리즘을 형식주의라고 번역하게 되면, 다른 분야에선 괜찮을지 몰라도 건축에서는 형태적 뉘앙스가 실종되어버린다.
다시 서구 건축인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참고로 건축은, 관념을 형태로 직역해보는 다소 단순하고 용감한 구석이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의 폴딩 철학을 말 그대로 ‘접힌’ 형태로 직역했던 전례가 있다. 어찌 보면 유치한 이 습속은 form이라는 한 단어가 관념적 아이디어와 가시적 형태를 둘 다 동시에 지칭하기 때문에 생기는 독특한 현상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포멀리즘도 건축으로 넘어오면서 건축의 ‘형태 자체'에서 내부적 질서를 찾는 시도로 축소되었다. 초기 포멀리스트들은 형태를 초월하면서 메타적이고 자율적 지식체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들 안에서 자율적 논리 체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주요한 건축적 요소들을 끌어온 뒤,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비율과 구성 논리 등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 나섰다.
사실 이러한 축소-적용은, 형태의 질서를 추구해오던 전통-건축적 태도를 가진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유럽의 전통적인 건축 교육은, 그들이 의미 있다고 믿는 특정 조형의 반복 재생산을 통해, 그 안에 담긴 파르티(Parti, 번역하자면 형태 속의 정수이자 진리)를 이해하고 전수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것은 에꼴 데 보자르 교육 시스템의 근간이자 전통 건축의 디서플린이었다. 그런데 모더니즘은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백지화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유토피아가 곧 실패를 선언하면서, 이는 전통적 교육을 받은 건축인이 자신들이 배웠던 과거의 질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들은 모더니즘을 전통적 질서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건축 실험으로 간주함으로써 디서플린으로 귀속시키고 싶어 했다. 콜린 로우가 The Mathematics of the Ideal Villa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르꼬르비제와 팔라디오를 엮은 것은 이러한 태도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초기 포멀리즘이 다소 억지스러웠다는 것에 있다. 콜린 로우가 포멀리즘적 관점을 통해 모더니즘을 그간의 건축역사에 포함시키려고 한 시도는 좋았으나, 둘 사이의 형태적 연관성을 규명해나가는 구체적 논거는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거의 없었다. 이후에도 일부 포멀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등장했던 건축요소에만 관심을 갖고 특히 여기서도 조형에 숨겨진 질서를 찾는데만 천착했다. 최근 포멀리스트들의 포셰(poché)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점들은 포멀리즘이 동시대적 맥락과 외부와의 공감대를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만들었다. 특히 서구 건축 내부의 논리 안에서만 순환하는 특성으로 인해, 포멀리즘은 한국 건축계에서 더욱 공감을 얻지 못하고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포멀리즘이 무용하다고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포멀리즘의 가치는 건축계에서 시도했던 내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멀리즘적 접근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포멀리즘은 건축이, 그 세부적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자율적 형식체계로 독립적 실존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즉, 건축은 외부의 요소와는 아무 상관없이 건축 그 자체로 존재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멀리즘은 이상적이긴 하나 다소 뜬구름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극단적인 상대성에 기반하는, 오늘날 특유의 존재론적인 관점에 대응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즉, 건축과 자신의 전통적인 매체(드로잉 및 건물 등)와의 관계가 어떻게 허물어지든 간에 건축은 건축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이러한 경향을 가속시켰다. 이 와중에 건축은 벌써부터 100년 전 모더니즘 시기에 비물질의 미디어로 존재의 둥지를 옮겼다. 건축이, 건물 등의 물리적 실체가 아닌 관념적 체계 그 자체로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가상현실과 실제계 혹은 자연물과 인공물 등의 모든 시스템들이 동등하게 실존하는 시대가 왔다. 포멀리즘은 건축이 이에 대응할 바탕을 다져주었다. 그렇다면 건축은 다음에 어디로 흘러갔을까?
덧. 건물이 없는 건축? 현대 미술 관련자들에게는 식상한 이야기이겠지만, 한때는 페인팅이 거의 전부였던 파인 아트가 이제는 페인팅에만 연연하지 않는다. 특정 매체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 미술은 자신의 존재 가치와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이 것도 거의 100년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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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순서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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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palladio & le corbus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