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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Sep 24. 2019

오늘날의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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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이즘에서 파라메트리시즘의 실패를 짚고 넘어가자. 파라메트리시즘은 디지털 건축이 태동할 때 거의 모든 유명 건축 아카데미를 장악했었던, 당대 테크놀로지 도입의 선두였다. 특히 알고리즘을 통한 디자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유려한 에스테틱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들은 비정형 건물의 구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세계 건축 시장이 통합되는 흐름 위에서 초대형 오피스와 스타디자이너를 탄생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 파라메트리시즘은 기술과 에스테틱 양 쪽에서 실질적인 성취를 얻었다. 하지만 오늘날 컨템포러리 건축계 대부분은 여기에 등을 돌렸다. 왜냐하면 파라메트리시즘에는 자체 논리의 심각한 결함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 내용은 오늘날의 변화된 리얼리티와 정면으로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파라메트리시즘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자 실패 요인은 자신들의 거짓말이다. 그들은 들뢰즈의 생성적 철학을 바탕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자가-생성적 메커니즘이 결국에는 순수-자연의 형태 메커니즘을 닮게 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알고리즘을 통해 유기적 형태의 결과값을 얻어낸 뒤, 이를 디지털 시대에서 건축이 가야 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실 이들이 제시하는 알고리즘 테크놀로지와 유기적 형태는 서로 상관이 없으며 그저 누군가의 상상에 의해 인위적으로 짜 맞춰진 조합이었다. 여기서 전자는 시대적으로 주어지는 도구이며, 후자는 개인의 에스테틱 패티시다. 정리하자면, 자신의 미적 취향을 쫓기 위해 주어진 상황을 알리바이로 둘러댄 것이다. 즉, 필연으로 포장된 것들이 실제로는 자의적 결과였다. 그래서 실제로 그들이 한 행위는 해당 알고리즘의 거의 모든 단계에서 결과가 특정되게끔 끊임없이 개입하고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철학과 테크놀로지가 데려다주는 어쩔 수 없는 결과처럼 포장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는 자신들의 결과물이 스스로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착각하거나 혹은 둘러댔던 것일까?


사실 이러한 경향은 ‘운명론적인 형태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디자인의 알리바이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 역사에서 파라메트리시즘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자신들이 창조하는 형태에 언제나 정답 같은 알리바이를 부여해야 했기에, 늘 이러한 유혹에 시달려왔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행위에 권위와 설득력이 쉽사리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형태에는 어떠한 정답도 과학도 없다. 이는 아름다움이 하나로 요약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건축은 거대한 자본과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반영구적으로 존속하는 대형 구조물의 형태를 결정해야 했다. 따라서 건축가는 표면적으로 탓을 돌릴 무언가가 끊임없이 필요했다. 그것은 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절대성을 추구하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 강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파라메트리시즘이 후기구조주의 철학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등, 패러다임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대에 대응했어야 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운명론적인 형태론’의 자매품으로는 모더니즘이 있다. 사실 모더니즘이야말로 기계화, 산업화 그리고 전후 상황에 맞서 대응해야 하는 절박한 신세였다. 특히 당시 건축가들은 과학의 발전에 맞서서 과학에 뒤지지 않는 건축 알리바이를 갖추고 싶어 했다. ‘장식은 죄악’ 혹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와 같은 명제는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하는 운명론의 대표 사례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 벤추리가 입증했지만, 건축에서 형태가 기능을 따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기능은 다양한 형태에서 똑같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은, 이면적으로는 자신들의 에스테틱 스타일을 추구해 놓고서는, 그 형태가 ‘기능을 따르다 보니 생긴 결과’로 읽히길 희망했다. 이 명제의 유령은 지금까지 남아서 건축인들의 시야를 가린다. 그래도 이는 르 꼬르뷔제의 모듈러가 갖는 허무맹랑함에 비하면 양호하다. 로빈 에반스는 그의 책 The Projective Cast에서 모듈러의 허구성과 이 것이 사실은 꼬르비제의 조형 욕망을 위한 핑계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황금 비율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오류이다.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 이후의 다른 건축 실험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땅이 시키는 건축 같은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은 창작자가 자신의 조형 욕망을 설득시키기 위함이거나, 자신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의지하는 핑계이다. 오늘날 우리는 형태가 어떠한 운명도 따를 필요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냥 그런 형태가 만들고 싶었음에 솔직해져야 한다. 


물론, 운명론적인 관점은 새로운 사조가 전례 없던 영역으로 도약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왜냐하면 과몰입된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성이 커지면 그만큼 모순도 커져간다. 따라서 적절히 무르익으면 그 과정이 악화시킨 모순과 부작용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진다. 파라메트리시즘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된다; 조형 욕망과 알리바이의 도치는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가? 그리고 이는 다음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무비판적으로 접근했던 비정형-유기적 에스테틱은 무엇이 문제인가?  






- 다음 글 /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글의 순서


0. 건축과 건물의 관계

1.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2.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3. 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6. 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7.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8.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링크 공유는 환영합니다.

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Parametr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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