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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Oct 09. 2019

건물 만들기 그리고 건축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이전 글 /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이 시리즈 전반에 걸쳐 '건축'이라는 단어는,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아카데미 기반의 architecture에 대한 번역어로서의 의미로 한정했다. 번역어의 한자 자체가 독자적으로 내포하는 뜻(세우고 쌓다)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확장되어 사용되는 의미는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렇다면 건축과 한국에서의 건축이 갖는 의미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다음의 후기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얕게나마 찾아보는 과정이다. 그리고 앞선 글들이 건축의 입장이라면 이번 글은 건물의 입장에 좀 더 가까운 글이기도 하다.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이 글은 ‘건축과 건물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건축의 독립적 성격이 구체화되어가는 상황을 추적하며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이라는 제목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특수한 맥락에서, 건축과 건물의 관계는 추가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 건축계에서는 워낙 많은 개념들이 제각각의 사용 영역으로 뒤엉켜있기 때문이다. 앞선 글들은 꾸준히 지역성의 무의미함을 주장했지만, 이번 글은 이에 반하여 한국의 내부적 상황을 짚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삶에서 지역이 주는 관성은 사라져 가더라도, 지역 업계의 내부에서 기존 시스템이 남기는 업보는 건축가의 행위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건축과 건물의 관계에 관하여 한국에서 특히 분명해져야 하는 부분은 이전 글에서 언급된 문장으로 정리가 된다: ‘건물을 잘 짓는 일’과 ‘건물을 잘 디자인하는 일’과 ‘건축’, 이 셋은 가까운 친척 관계인 별개의 프로페셔널이다. 이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좋은 공간과 풍경을 제공하는 일에 해당하며,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둘은 좁은 의미의 건축에 해당되지 않는다. 반대로 건축은 좋은 공간 제공에 있어서 필수요소는 아니다. 이 셋은 교집합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분명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건축가’라는 이름의 영역은 첫 번째를 위한 매니지먼트 및 엔지니어링,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모두 아우른다. 그렇다면 이 셋 사이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한국의 건축가는 이 셋을 다 잘 이끌어가고 있는 걸까?


이를 위해 세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건물을 잘 짓기 위한 매니지먼트 및 엔지니어링(공학적 설계), 이 것은 보통 한국 사람들이 ‘건축'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역할이다. 실제 학문으로서 건축은 이와 거의 무관하다고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꽤나 강력하여 건축 학계와 시장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건축학과를 졸업한 사람에게 법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지우는 영역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건축사’ 제도이다. 한국의 건축사는 그 업역이 매우 좁은 대신에 분명하며, 이는 다소 유연하게 활용되는 다른 나라의 등록-건축가 제도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건축사는 인허가 등의 건물-지음과 관련한 대관업무에서 독점적 권한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으며, 건물의 법-제도적 속성과 기능에 관한 전문성을 요구받고, 그리고 건물에 설계 또는 관리의 문제로 사고가 나면 법적인 책임을 진다. 이를 위한 건축사의 역할은 계획(설계)이 구현(시공)되는 과정을 매개하는 중재자이며, 설계를 최종적으로 확정 짓고 이를 시공 및 사용 과정에서 유지 및 관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건축사는 건물에 관한 독점적인 전문영역을 갖는 별도의 직업군이다.


하지만 건축사는 건물과 공간의 심미적 문제에 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여기에 전문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사 제도가 일제강점기부터 비롯되어 존속되어왔음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보통 건물들이 심미적으로 조악한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한국의 일부 자칭-건축가들은 이들을 건축가가 아니라며 허가방, 집장사 혹은 건축업자로 분류하고 무시하지만 이는 옳지 못한 처사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국에서 엄연히 건축학과를 졸업한, 자신들의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남 탓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사실 현행 건축사에게 필요한 잣대는 심미적 판단이 아니라, 이들 업무의 고유한 책임과 권한에 관한 지적이어야 할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시공은 도면대로 하였으나 단열설계의 실패 혹은 단열기준 미비로 인한 ‘결로 및 곰팡이 발생’은 건축사의 책임이다. 그리고 건물의 기능을 보장하는 설계내역을 ‘제도’로 구축 및 업데이트하는 일도 건축사 집단의 사회적 책임이 된다.


그렇다면 건물과 공간의 심미적 문제에 관한 책임은 누가 지는가?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으나, 이는 디자이너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건물을 잘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영역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못생긴 한국의 건물들은 그동안 도대체 누가 디자인한 것일까? 사실 여기엔 디자이너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 사회에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 반세기도 되지 못했다는 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건물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 및 시각자료 등에 걸친 모든 분야의 공통사항이다. 건물의 경우는 비 새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데 값도 싸면 더 이상 무언가를 묻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따라서 설계업무는 건축사로 충분했다. 혹은 디자인 요구가 있더라도 그것은 배치와 모양새에 관한 표면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추상과 구상이 구분되지 않았는지, 유명 디자이너조차 특정 모양을 본뜬 직설적 건물 형태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는 전공자를 포함하더라도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안타깝게도 디자인에 대한 몰이해는 건축계 전반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설계과정에서 디자인은 멋을 부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심미성 등을 기반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는 조형을 기반으로 건물의 형태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해오던 좁은 의미의 건축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따라서 자신의 조형 욕망을 관철시키는 것은 디자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엔지니어 등이 주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섬세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자질구레한 단계들이 디자인의 주된 업역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로 인해 얻게 되는 결과물의 주된 성취는 감성적 품질 전반의 향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건축계에서는 디자인이 꾸밈, 요란함, 드라마틱함, 그리고 형태를 통한 자기표현의 등가어로 인지되는 것 같다. 게다가 이는 예술에 대한 몰이해까지 더해져, 일부가 예술(성)을 운운하고 작가로 자칭하는 상황까지 이어진다. 이는 아뜰리에 문화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에 대해 건축가 또는 건축은 조각가 혹은 조각예술이 아니라고 비판을 가세하지만, 이 비판마저도 건축, 디자인 그리고 예술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한 겉핥기 지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디자인이 외형적 멋 부림으로 축소 왜곡되어 사용되는 현실은, 건물 설계 과정에서 디자인의 주된 업역이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상황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어설픈 겉멋에 취한 꾸밈 행위를 디자인이라고 착각하고 행할 때, 다른 한쪽은 이에 대항하여 꾸밈에 치우진 건물-설계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엔지니어링적인 속성을 부각시킨다. 인문학적 건축의 유행도 마찬가지고 이에 대한 반작용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인문학적 건축 또한 디자인 의미-영역의 공백에 밀고 들어온 사이비다. 갑론을박은 벌어지지만 누구도 디자인에 대한 이해는 없어 결국 디자인은 실종되어버리는 상황이 계속 발생한다. 이에 일반적 건물을 위한 디자인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모든 건물이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필수요소다. 이는 소형차라고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이 와중에 조형성은 과대평가되어, 건물이 조금이라도 잘 다듬어진 조형성을 획득하면 해당 디자이너가 작가 혹은 작가적 건축가 등으로 지나치게 칭송받는 비극이 일어난다. 잘 다듬어진 조형성은 신경 쓴 건물이라면 기본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지만, 디자이너가 없는 토양에서는 여기에 공백이 발생하니 너도나도 이를 쉽게 성취하고서 예술가가 된 것 같은 자아도취에 빠진다. 최근 일부 젊은 건축가상을 필두로 많은 소규모 아뜰리에의 작업들이 이 덫에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조형적 성취가 과대평가되는 것은 공과대학 소속에서 비롯되는 조형에 대한 결핍이 허상으로 변질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과하지 않은 평가가 정착되어야 진짜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소수의 건축물도 발전하고 보통 건물의 조형성도 같이 발전한다.


덧붙여 작가의 평판을 지닌 건축가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현대의 예술에서 작가는 심오한 철학과 작품세계를 혼자 탐구해나가며 진리를 쫓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오늘날의 작가는 동시대와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비평으로써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한국에서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진짜 건축 작가는 누구일까?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작가-건축가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은 작가의 허물을 두른 디자이너다. 그런데 문제는 역할은 디자이너인데 태도만 작가의 것을 선택적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도면을 잘 그렸는데, 너네들이 시공을 못했어’ 같은 직무유기적인 남 탓이 발생한다. 세상의 어느 디자이너도 디자인은 잘했는데 완성품이 엉망이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완성품이 조악하다면 그것은 디자인의 실패다. 디자이너로서의 직업정신은 구현에 관한 인프라와 디테일까지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엔지니어와 동등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설득을 통해 디자인의 영역을 확실히 확보해야 한다. 실제 구현의 대상에 관하여, 그림만 그리는 게 전부인 디자이너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건축에서는 존재한다. (물론, 한국은 엔지니어가 디자이너를 배제하고 멋대로 디자인하는 나쁜 사례가 더 많긴 하다.)


그렇다면 세 번째 카테고리의 '건축'은 무엇인가? 앞서 보통 한국 사람들은 ‘건축’이라는 단어를 듣고 ‘건물을 잘 짓기 위한 매니지먼트 및 엔지니어링’을 떠올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업계 주변에는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편견도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건축’ 혹은 ‘건축가’를 특별하거나 드라마틱한 형태나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오해는 디자인 의미-영역의 실종이 좁은 의미의 건축에 대한 오해와 겹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지만, 건축은 ‘건물을 디자인하는 행위’ 뒷면에 추가적인 맥락을 담고서 이 부가적 영역을 탐구하고 확장하는 분야이다. 따라서 디자인이 특별하다고 건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 특정 건물이 건축이다 아니다 유무를 따지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건축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건축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작품처럼 보이는 건물을 디자인했다고 해서 다 건축가는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건물 디자이너는 건축가를 겸할 수 있고, 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건축사도 건축가와 같은 관계를 갖는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유명 건축가의 숨은 뜻은 ‘하이엔드-건물 디자이너’ 정도 되겠다. 이 중에 진짜 건축가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또한 건축가가 아니라고 해서 급이 낮은 것도 아니고, 건축가에 해당한다고 해서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다른 것이다.)


건축은 좋은 교양이다. 이 개념은 아카데미를 바탕으로 쌓아 올려진 특정한 세계관이며, 시대별로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와 이미지를 생산한다. 하지만 건축이 건물 디자인에 대한 주된 배경지식이 되기엔 포함하지 않는 지식이 너무 많다. 왜냐하면 건물-디자이너나 건축사는 건축을 벗어나는 다양하고 심도 있는 실질적 지식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건축가는 건물-디자이너나 건축사(혹은 엔지니어)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을 수반한다. 게다가 실질적 지식들은 적지 않은 경우로 그 가치관이 건축과 충돌한다. 이 때문에 특히 건축적 세계관을 주입받은 사람이 건물-디자이너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 특유의 관성에 고립되어 디자인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서 건축은 극복의 대상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건축가의 전문성은 현실로부터 거리를 적당히 둘 때 유지될 수 있다. 이는 건축의 메타적 속성 때문이다. 따라서 한 울타리 안에서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모든 것들은 현실에서 ‘건축’이라는 한 단어로 뒤섞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모든 영역을 구분할 단어들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분별은 요원하고 혼돈만 가중된다. 이는 먼저 시장에 혼선을 야기한다: '건축가'에게 무슨 일을 맡겨야 하는가? 이는 교육현장에도 많은 혼선을 불러일으킨다: '건축학과’를 나왔다는 것은 무슨 지식을 습득했다는 뜻일까? 건축 전공자는 '건축'을 배운 것일까, '건물-디자인'을 배운 것일까, 예비 건축사로서의 기초를 다진 것일까? (사회적 권한과 책무로만 보면, 다른 건 몰라도 건축사로서의 기초 소양은 확실히 다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다른 건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그렇다면 ‘건축학과’는 건물에 관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참고로, 자동차든 휴대전화의 어플리케이션이든 다른 인공물에서 이 모두를 한 번에 가르치는 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공을 살려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희미해지는 흐름 앞에서 이는 무가치한 지적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러한 혼란 속에 각각의 전문성은 모두 미궁에 빠진다. 우선 ‘건축'의 전문성이 실종된다. 건축학과는 건축에 집중할 수 없는 교육영역과 진로체계를 가지고 있다. 건축은 아카데미를 기반하지 않으면 실존하기 어려운 영역이지만 학교는 건축을 제대로 품지 못한다. 그래서 건축과를 나와도 오리지널 건축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다. 그렇다고 학교가 건축과는 분명한 경계를 설정하고 건물-디자인을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지식으로 전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안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쪽이나마 디자이너로 교육받은 이들에게는 생업을 위해 건축사를 취득해야 하는 현실이 기다린다. 취득 이후에는 관공서를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한다. 이 뒤엉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는 기성세대인 교육자마저도 전문성이 모호해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건축은 원래 그렇게 종합적인 것이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셋 중에 뭐 하나라도 확실하게 잘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의 전근대적 속살을 드러낼 뿐이다.





덧.


1. 건축은 건물을 떠나고, 건물 설계 영역은 또 그 자체로 별개의 카오스인데, 뭘 하든 그냥 클리셰 속에서 공회전하는 거라면 도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질문이 스스로에게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되, 분별을 잘 하자’ 뿐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파편이 되는 시대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입장에서 한국의 공간 사용자에게 필요한 것은 건축을 위한 건축 또는 디자인 허세가 아니라 (심미성과 기능을 모두 포함한) 공간복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저성장 양극화 사회에서 이는 요원해 보인다.


3. 모두가 건축가가 되면 큰일난다! (좁은 의미의) 건축가가 과잉공급 될 수록 건물은 더 안좋아진다.




글의 순서



0. 건축과 건물의 관계

1.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둥지: 매스미디어

2. 포멀리즘, 건축의 새로운 존재방식

3. 변화하는 바탕, 이미지와 리얼리티

4.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1, 그들의 거짓말
5. 파라메트리시즘 비판 2, 매체와 에스테틱

6. 컨템포러리 1, 포스트 디지털

7. 컨템포러리 2,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8. 후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들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링크 공유는 환영합니다.

표지 사진: 구글 이미지 검색 다세대주택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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