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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Sep 12. 2022

나의 문장 수집 생활

우표가 아니라 문장을 모읍니다.

29CM의 카피라이터 이유미의 <문장 수집 생활>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녀의 취미가 굉장히 신선했다. 그녀는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소설을 늘 읽는데 읽으면서 공감되는 문장에는 밑줄을 그어 놓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타이핑으로 필사를 한단다. 일종의 문장 수집이다. 그녀는 자신이 만드는 카피에서 남다름을 추구하기 위해 이러한 취미를 가졌다는데 나는 그녀만의 업무방식인 '소설로 카피 쓰기'가 너무나 부러웠다. 내 기준으로는 최고의 성덕(성공한 덕후)이었다. 소설을 읽고 필사를 하는데 그걸로 카피를 만들어서 돈도 벌다니! 일과 취미의 병행이란 이렇게 하는 거였다.


그녀는 책 읽는 습관도 남달랐는데, 책을 'TV 채널 돌리듯' 여러 권을 동시에 본다고 한다. 심지어 읽는 책의 종류에 따라 보는 시간대도 다르다고. 나도 이런저런 책을 뒤져가며 책을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력 부족이라 여기며 '잡독'을 한다고 부끄러워했었다.  하지만 고유한 책 읽기 습관에 대해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말고 이렇게 새롭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이 놀라웠다. 나도 좀 더 본격적으로 여러 권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듯 소설을 조금씩 아껴보고,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듯 벽돌책을 한 챕터 읽고 덮어둔다. 좋아하는 시리즈를 정주행 하듯,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보고 또 본다. 


그녀는 자동차에 시집을 두 권 정도 꽂아두고 신호가 길거나 차가 막힐 때는 휴대폰 대신 시를 켠다고 했다. 시를 켜다니! 이런 문장에는 눈이 한참 머문다. (그녀는 천상 카피라이터다.) 그녀의 이런 틈새 독서 전략 덕분에 나도 손 닿는 곳 여기저기에 책을 쑤셔두고 틈틈이 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나도 스마트폰을 켜듯 책을 자주 여러 곳에서 켠다. 머리를 말리면서도, 커피를 내리면서도 손에 닿는 책을 열어 한 두 페이지라도 매만지며 본다.


소설을 읽으며 음미하고 그것을 통해 생각에 잠기는 과정은 소설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창의적 필사'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소설을 필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문장을 있는 그대로 따라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눈이 머무는 문장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장들을 수집하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소설을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포스트잇이 붙은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소설가들은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모든 일상적인 문장들도 겹겹이 의미를 덧입고 있었다. 그런 문장들. 생각에 잠기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문장들을 타이핑하고 있다 보면 뿌옇게 흐린 머리가 서서히 맑아졌다. 어느 순간 나도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 봄날의 새싹처럼 불쑥불쑥 돋아났다. 사실은 그런 의지가 솓아오를 때까지 필사를 한다. 써야 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전혀 무관한 소설책을 뒤적이며 문장을 수집한다. 스스로에게 물과 영양분을 주듯 좋은 문장들을 손으로 캐내 머릿속에 소복이 담는다. 


우표수집가들을 보며 저런 걸 모아서 뭐하나? 생각했던 나는 이제는 그런 우표수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 수집을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집된 우표들을 하나씩 넘기며 보다 보면 그 우표를 처음 떼서 붙이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이 되는 시대에서 문장을 수집한다는 것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아무런 가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사치가 될 수 있다. 문장 수집은 일종의 정신적인 사치이다. 돈이 되지도 않지만 돈이 들지도 않는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마음만 있으면 어떠한 소설 속의 문장도 수집할 수 있다. 그렇게 모아놓은 문장들을 나만의 수첩에서 정렬해두고 바라보다 보면 소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고유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문장이 내 눈앞에 오롯이 앉아있다. 그러한 문장들을 여러 번 매만져보며 지난 꿈처럼 소설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이러한 문장 수집은 좀 더 나아가서 영감을 주고 글의 소재가 되어주고 문장을 매끄럽게 해 주는 데에도 도움도 된다.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지만 글쓰기를 즐겨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소설 속의 문장들의 스승이 된다. 


원래의 소설에서부터 각자 독립되어 나와서 모인 문장들을 바라보다 보면 일상에서 비슷한 순간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일상의 따분한 경험이 마치 소설 속에서 이미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일상은 식상하지 않다. 비슷비슷한 일상 속에서도 깨달음을 주는 순간들은 여러 번 찾아온다. 오늘 하루도 언젠가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이 깔린 하루다. 숨겨져 있는 단서가 무엇인지 유심히 보게 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습관이 인생의 큰 방향을 바꾸기도 하듯, 아주 별 볼 일 없는 작은 생각의 변화가 일상의 고단함을 좀 더 부드럽게 바꿔주기도 한다. 문장 수집이라는 작은 취미가 내게는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미세하게나마 조정해주기도 한다. 앞으로는 내가 수집한 문장들을 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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