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그림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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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과일 가게 김 씨는 몸이 불편해 누워 있는 박 노인을 찾아왔다.
친척이 아닌데도 김 씨가 매일 찾아온 지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단지 자신의 가게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보살펴주니,
박 노인은 김 씨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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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김 씨는 빈손으로 온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팔고 남은 것이라며 건넸지만, 언제나 싱싱한 과일만 골라 가져오는 것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한 달에 한두 번씩 쌀까지 사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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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밝은 얼굴로 찾아와 장사가 잘된다고 자랑하며 즐거워하는 김 씨.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의 환한 미소는
박 노인에게 가장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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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저 내일 이곳을 떠납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박 노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더 큰 가게를 얻어 이사를 가게 됐다니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박 노인은 김 씨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축하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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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김 씨는 마지막까지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과일과 쌀을 방 한쪽에 남겨두고는 뒤돌아 떠나갔다.
그날, 김 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건 박 노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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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가 떠난 지 며칠 후,
박 노인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모두 김 씨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진 박 노인은 김 씨가 있던 과일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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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곳엔 텅 빈 가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직 새 주인이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 노인은 앞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가게는 왜 비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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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대답은 박 노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저긴 장사하던 사람이 크게 망한 곳이라 선뜻 새 주인이 안 나타나요.
전에 있던 김 씨도 겨우 작은 가게 하나 얻어서 지방으로 내려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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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 노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토록 힘들었으면서도 한 번도 힘든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던 김 씨.
남은 것이라며 매일 비싼 과일을 건넸던 김 씨.
마지막 순간까지 늙은 노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떠나간 김 씨.
그의 크고 따뜻한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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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마을 언덕 위 작은 교회 종탑을 감싸 안았다.
그곳에서 흔들리는 종을 바라보며, 박 노인은 김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팔다 남은 싱싱한 과일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있을 김 씨.
박 노인은 그를 위해 가만히 두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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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팔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