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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땐 그랬다(2) -교육, 해병대 훈련 아냐?

CH III. 100 깡마다 공포, 그리고 교육

by 관계학 서설 II Jan 31. 2025

“New members of the university scuba diving club were required to retrieve a coin from a depth of six meters without any equipment before being granted the opportunity to use a scuba regulator.”

체험, 속성, 도전 다이빙 등, 무자격 다이버들이 많았다체험, 속성, 도전 다이빙 등, 무자격 다이버들이 많았다

  그땐 온라인 동호회와 학교 동아리 내에서는 물론 전문 업계 내에서도 야전출신의 무자격 교육강사도 많았고 군대식 교육과정과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교육과정들

  자격여부를 떠나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스쿠버다이빙을 가르쳤다. 요즘은 제한수역 교육을 할 수 있는 잠수풀이 전국적으로 웬만한 지역이면 다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서울 도심조차 잠실 유명 백화점 잠수풀과 올림픽 다이빙풀 등 2개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잠수풀을 한번 이용하기 위해서는 놀이공원 청룡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듯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잠수 풀내에서도 수면은 물론 수중조차 상하좌우 30cm 간격으로 초보 다이버들이 있어 공중목욕탕만큼 붐볐다.


  더욱 기절초풍할 광경은 대학교 동아리 1.2학년 대상 '물 적응훈련(Watermanship training)'이었다. 3.4학년 선배들이 6m 수심에 10원짜리 동전을 20여 개 흩뿌려놓고 10여 명이 아무런 주의사항이나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맨몸으로 물속 동전을 주워와야 스쿠버 교육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바다 인근에서 웬만큼 자맥질에 익숙한 소년 시절을 보내지 않은 이상, 해군에서 2-3년 수영 연습을 겪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도전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면 아찔한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대학 동호회, 신입생들의 수난들

  그땐 다이빙 샵도 많지 않았고 공기탱크를 채울 수 있는 컴프레서마저도 대학교 동아리 후배들이 짊어지고 투어야 참가해야만 했다. 고물 컴프레서로는 오랜 시간 노력해도 공기통의 반도 못 채우기가 일쑤였다. 그마저도 고학년 선배들의 차지였고 신입생들은 서너 모금 호흡할 수 있는 공기통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곤 했다.


  학교도 그랬지만 온라인 동호회엔 군대 출신의 강사분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픈워터 교육과정 중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서 익혀야 하는 고난도 훈련을 시키는 거나 '숨' 오래 참기를 넘어 물고기 수준의 폐활량을 요구하는 도전과제를 마스터 과정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교육과정에서 없어진 오픈워터 해양실습의 마지막 도전과제였던 '독수리타법': 웨이트 벨트 풀고 상승 속도를 줄이기 위해 뒤로 눕으면서 수면으로 올라오는 비상탈출은 그땐 그나마 양반 축에 속했다.


  강사와 교육생간의 다툼도 참 많았고 싸우면서 '정'이 드는 남자 강사와 여자 교육생의 에피소드는 빛바랜 '낭만'이었다.

2000년초 온라인 최대동호회는 인스(INS)클럽이었다2000년초 온라인 최대동호회는 인스(INS)클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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