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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13. 내 가슴이 들려준 이야기

그 후로도 나의 명상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점점 더 평온해지는 내 마음과 줄곧 안쪽을 향하는 마음의 시선 덕분이었다. 이제 나는 평온함 속에 내가 찾은 빛의 방향으로 글을 써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토록 꿈꾸던 작가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명상이 깊어질수록 나는 또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감정적 요동이었다. 크나큰 감정의 덩어리들은 아무리 호흡이나 몸의 감각으로 주의를 옮기려 해도 점점 더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전에 없이 크게 흔들렸다. 불안함, 초조함. 이제 더 이상 느끼지 말자고 다짐했던 나를 힘들게 하던 감정들이었다. 나는 전에 없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 감정들은 모두 내가 무시하고 거부했던 것들이었다. 외면하고 밀쳐두어서 사라졌다고 여긴 감정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날아들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해소되기 위해 하나 둘 표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속도를 찾아야 한다며 조급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운 일, 긴 시간을 홀로 고군분투한 외로움, 막막한 미래에 대한 크나큰 두려움, 늘 내 주위를 맴돌던 원인 모를 불안함까지. 이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내 안에선 극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스스로를 다그쳤었고, 급기야는 그런 감정은 내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외면해버리곤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심판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믿고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안의 심판자 때문이었다.  


“왜 너는 그것밖에 못 하니.” 

“더 잘했어야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금물이야.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해.”  


세상이 내게 퍼붓는 말들이라고만 여겼던 말들이 사실은 내 마음이 나에게 퍼붓고 있던 다그침이었다. 세상이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는 동안 나는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무척이나 혹독하게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었다. 나에게 나는 너무나도 가혹한 심판자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혹한 형벌을 그만 눈감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바깥의 사람들이 아니라 내 안의 심판자를 가장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 심판자를 부모님이나 친구들, 세상의 그 어떤 누구보다도 의식하고 눈치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나를 그토록 억압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걸.  


정말 그랬다. 끊임없이 내가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의 시선, 타인의 시선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늘 나를 평가하고 점수 매기려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매긴 점수는 늘 부족하고 모자랐다. 나에게 난 그랬다.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 늘 더 애쓰고 더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내가 나를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나를 다그치고 몰아세우고 있었다니. 조은지가 조은지에게 원망 가득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겹쳐 양쪽 가슴에 얹고는 도닥거렸다. 이제 그렇게 스스로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나를 심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그만 내 안의 심판자를 놓아 보내주자고. 그 뒤로 내 오랜 심판자는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를 줄여 나갔다.   


심판자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연약하고 불안에 떠는 내가 남아 있었다. 혼자서 끙끙댔을 지난 날들. 내가 나를 사랑해주지 못한 시간들. 그 시간들이 떠올라 너무 마음이 아팠다. 왜 내가 나서서 나를 그토록 미워해야 했을까. 왜 내가 먼저 나를 그토록 호되게 평가해야만 했을까. 내 노력에 대해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응원해주고 감싸 안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 화창한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명상을 하고 있는데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조은지, 기죽지 마. 너 열심히 살았잖아. 할 만큼 했다고. 남들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부족해하고, 조급해하고. 그러지 않아도 돼. 이제는 불안해할 필요 없어. 지금 넌 진짜 네가 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중이잖아. 네가 되는 것, 그것보다 멋진 일이 또 어딨겠어.’   


그제야 진짜 내가 보였다. 나는 한참 부족하다고. 저기 저 빛나는 곳에 가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그건 단지 기준이 외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내 목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의 나로도 충분했다. 늘 나만의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더 빨리 가려, 더 잘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여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를 괴롭히는 내 잘못된 생각들을 그만두고 최선을 다한 나를 믿어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진짜 내가 되기 위해 지금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거라고, 이렇게 여기까지 잘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내 모습을 보기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는 내가 잘못했던 일들, 내 못난 점들만 수두룩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럴수록 자꾸만 바깥을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 해온 게 아닐까. 보기 싫은 내 모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까지 스스로를 외면해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진짜 목소리가 전해준 선물 같은 이야기처럼 중요한 것은 모두 다 내 ‘안’에 있었다.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 그렇기에 나를 믿고 사랑하기 위해선 그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 내 진짜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진짜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토록 외면해왔던 껄끄러운 감정들을 하나 둘 조심스레 마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내 속마음. 심지어는 나조차도 까마득히 모른 채 하고 있던 내 여린 마음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댄 내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 등을. 더 이상 나의 소중한 감정들이 숨어 울지 않도록 온전히 감싸 안고 위로해주어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해묵은 감정들을 차근차근 꺼내어 하나씩 하나씩 안아주었다.  


안녕, 나의 불안아.   

안녕, 나의 우울아. 

안녕, 나의 두려움아. 

안녕, 나의 슬픔아.  


나는 내 안쪽 어딘가를 지키고 있던 이 감정들을 쓰다듬고 보듬어 차례차례 보내주었다. 내가 나를 위로한다는 건 너무나 따스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도 주지 못하는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가장 따스하고 아름다운 선물.   


‘이게 진정한 위로구나,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하는 위로가 가장 따뜻한 위로였어. 어쩌면 이게 진정한 사랑 아닐까. 나의 어두운 면까지 모두 감싸 안아주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나는 이토록 생생하게 경험하고 익혀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명상을 할 때면 느껴지는 어떤 따스함이 있었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에게 보낸 조건 없고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내 안을 들여다보곤 했던 것 같다. 모든 생명이 자연스레 태양을 찾듯 나도 자연스레 내 안의 따스함을 향한 것이겠지.  


내 안의 따스함에 불안과 두려움이 녹아내리는 걸까.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옅어지곤 했다. 나와 내 속도를 진심으로 존중받는 느낌과 함께. 나는 그 소중한 존중과 위로의 감각을 잊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보자고 되뇌었다.  






그처럼 따스한 위로를 스스로 선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때때로 불안해졌고 막연히 두려운 마음이 올라오곤 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아직 다 해소되지 못한 과거 감정의 찌꺼기 일 수도 있었다. 지금 내게 불쑥 올라오는 감정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마이너스 감정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런 비난도 판단도 없이 그저 따스한 시선으로 내 안에서 피고 지는 다양한 감정들을 소중히 감싸 안아주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불안이 올라오면 불안을 오롯이 느끼며 그냥 그 불안을 품어 안으면 되는 거였다. 그게 바로 명상이 내게 심어준 힘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자기만의 길을 걷는다는 건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본능적으로 불안해지곤 한다. 그렇다면 종종 나에게 찾아오는 불안한 느낌은 어쩌면 내가 세상의 정답이 아닌 오직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때때로 내 안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환영의 마음으로 안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안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위에서 불안한 건 너무나 당연한 감정일 테니까. 그걸 잘못이라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내 불안을 따스히 감싸 안고 종종 이리저리 흔들리고 방황하면서 그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져 가면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면 되는 거 아닐까. 세상의 시선으로는 어쩌면 다소 느리게 보일지라도 그 길만이 온전한 나의 속도로 사는 길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나는 불안을 포함한 크고 작은 마이너스 감정들을 마주하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의식 저편에서 거부하고 외면하기 바빴을 그런 느낌과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들이 내가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느껴졌다. 이제야 진짜 내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기뻤다. 게다가 그런 마이너스 감정들이 내가 보다 인간적인 글을 쓸 수 있도록 나의 글에 멋진 향기를 입혀줄 것만 같았다.  


내 감정과 느낌을 모두 사랑해주자고, 따스히 안아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때때로 내 안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감정들을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응시해보려 했다. 그러면 감정들 나름의 속도에 따라 눈 녹듯 사라지거나 가슴 한편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덧칠해주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모든 마음을 감싸 안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급격한 동요 없이 편안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안에 나에 대한 알 수 없는 단단한 믿음이 자리잡기 시작한 건.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편안하고 자연스레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를 온전히 믿고 인정하며 내게 어울리는 속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방황하고 흔들리고 불안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작품 하나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냥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나아가야지.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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