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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18. 2024

최고령 자원 봉사자를 꿈꿉니다

힘이 닿는 한 도서관 자원봉사를 계속하고픈 마음

그날따라 여섯 글자가 확대경을 대고 본 것처럼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늘 상 우체통에 놓인 동네 소식지였고, 원래대로라면 분리수거함에 폐지로 처분될 것이 분명한데 굳이 그 안을 열고픈 충동을 주체하지 못했고, ‘자원봉사 모집’이란 문구에 매료되어 덜컥 신청했다. 운명이라면 운명이 다랄까.     


사실 자원봉사는 이번은 처음이 아니었다. 군대 제대 후 복학 때까지 남은 몇 달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우연한 기회에 수화를 배우게 되었고, 주최했던 곳이 자원봉사 단체여서 자연스레 장애우 목욕 봉사를 시작했다. 집에서 장애우시설까지 1시간 반이나 걸리는 길을 매주 빠짐없이 나갔다. 봉사는 생각보다 고됐다. 여럿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붙잡고 구석구석 씻기고 나면 한 시간은 훌쩍 넘었다. 이마엔 땀이 한가득 맺혔고, 팔은 잘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저렸다. 그래도 연신 고맙다며 밝은 미소를 보내는 분을 바라보며 힘든 줄도 몰랐다.      


고백하건대 그건 봉사라기보단 나를 위한 일이었다. 불안한 미래로 나락에 빠진 정신을 뚫어낼 돌파구가 필요했다. 힘든 봉사도 하고 난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며 자존감을 한껏 높이는 데 이용했다. 복학해서도 봉사를 이어갔고, 만 2년간을 꼬박 채우고 취업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그만두었다.    

  

이번에 도서관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나중에 꿈인 서점 운영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얄팍한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책이 가득 있는 공간에 머물 수 있다는 가슴 벅참도 진실이었다.

    

몇 차례 이직도 경험했지만, 현 직장에서 16년 차가 되었다. 연차가 쌓인다고 드라마틱하게 직장생활이 바뀌진 않아도 일에 숙련되고 건드리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무료할 틈은 없지만, 그 일이 그일 같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은 한때 이 일에 열정을 가졌던 기억마저 흐릿하게 했다.   

  

봉사 첫날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선배 봉사자들은 나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바삐 움직였다. 데스크에 앉아 책을 대출하고, 반납을 처리하고 기타 등등의 각종 민원을 처리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조금 한산할 때가 되어 그제야 얼굴 보고 인사를 나눴다.      


. 그 봉사 신청했다는 남자분이시죠. 제가 여기 봉사만 10년째인데 남자분은 처음이네요. 아무튼 반가워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에 접속하더니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했다. 일단 놓칠세라 노트에 받아 적었다. 그러던 중에도 수시로 이용객들이 오갔다. 옆에 선배 봉사자 뒤에 책을 빌리기 줄을 서자 눈짓으로 내가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한다고?, 이제 막 말로만 들었는데.’ 일단 거치대에서 바코드 기계를 꺼냈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우선 대출증을 받아 찍고, 차례로 대출할 책들에 갔다 댔다. 검지로 버튼을 누르며 ‘똑똑’ 소리에 책이 하나둘 표기되는 모습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누가 감성 변태 아니랄까 봐.  

    

무사히 대출 업무를 마치고, 이제는 반납대에 놓인 책을 하나 둘 책장에 꽂아야 했다. 그냥 들고 가려다 소독 티슈로 깨끗이 닦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원위치했다. 책장은 왜 이리 거대하고, 퍼즐 같은지. 책을 찾는 일보다 바로 넣는 일이 난도가 훨씬 높았다. 더구나 신간, 유아, 청소년, 소설, 경제 등등 분류는 또 어떻게. 더듬더듬 마치고 돌아오면 반납대엔 또다시 책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첫날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선 그대로 뻗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이 쪼그라들 듯 긴장이 풀려 삭신이 쑤셨다. 실로 오래간만에 느껴본 몸의 긴장이었다. 평소 같으면 부담되고, 가기 싫고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 긴장을 더욱 느끼고픈 충동이 비집고 나왔다. 살을 부대끼는 가족들도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했다. 아내도 그렇고, 아이들도 몹시 활기찬 내 모습에 무슨 좋은 일 있냐며 물었다.      


엔도르핀 보다 비교할 수 없이 센 게 다이돌핀이라는데, 이런 흥분된 기분은 정말 호르몬의 영향인지 합리적 의심마저 들었다. 한 주, 두 주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일이 익숙해졌다. 이제는 제법 능숙한 척(실상은 어리바리) 일 처리도 빨라지고 있다.      


적응되니 그제야 공간이 보였다. 도서관 가운데 동그란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읽는 꼬마 아이들과 가끔 보이는 노년의 책 사랑꾼, 책보다는 과제 공부가 우선인 두꺼운 안경의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지난주엔 책 정리하는데 고사리손 하나가 쑥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고작 4~5살의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내 손을 포개어 함께 책을 올려주었다. 아마도 조금 무거운 책에 고전하는 옆에서 보고는 도움을 주고 싶었나 보다. 꼬마 천사의 따스한 마음에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생각해 보니 책 냄새가 곳곳에 스며있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늘 동경하던 곳이었다.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 시절 소년으로 돌아가 보고, 만지고, 맡으며 다른 것 하나 없이 그 자체로 행복이 스며든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봉사하고 싶다.      


더불어 언젠가의 꿈을 위해 작은 싹을 틔우고, 그걸 키워나가며 남은 삶의 다른 방향을 찾아 나갈 것이다.



한 줄 요약 : 좋아하는 걸 발견하고 계속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의 큰 축복이다.






아재의 도서관 자원봉사 체험기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엊그제가 봉사를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석 달이 지났네요. 여전히 봉사 시간 동안은 이 공간이 좋다는 걸 느낄 새도 없이 바쁘지만, 잠깐의 여유에 책장 빼곡히 놓인 책들과 독서하는 회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힘이 닿는 아니 꼬부랑 할아버지가 때까지 봉사를 계속하고픈 소망입니다.


그동안 글을 읽고, 따뜻한 댓글로 공감과 격려를 해주셔서 무사히 연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외출하기 좋은 따스한 봄날이 찾아왔네요. 이 봄을 마음껏 만끽하세요!





#라라크루, #라라크루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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