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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현 Jan 26. 2022

낡고 스산한 날들

    가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무언가 다채로운 요소들이 한순간에 벌어져 가슴을 온통 울리고야 마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오는 그런 순간. 이제는 세상을 떠나간 친구와 저, 그리고 다른 두 친구까지 넷이 즐겁게 떠들며 걷던 밤길, 아파트 단지 틈새로 보이는 밤하늘과 스산하게 부는 조금은 차가운 바람, 바람에 스치며 소리를 내던 나뭇잎들. 그 사이를 지나던 우리의 웃음소리. 그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이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하겠구나. 이 기억이 내 가슴을 오래도록 흔들어 놓겠구나. 그리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종종 생각에 빠지고, 또 종종 웁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 아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햇살 같은 웃음소리와, 그날 불었던 스산했던 바람, 그리고 그 꿈. 그 아이가 찾아왔던 꿈. 잊고 싶지 않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손 끝이 닿았을 때의 미지근한 듯 차가웠던 감촉, 꿈에서 깨어나 많이도 울었던 날. 돌아올 수 없음을 다시금 절감하고 절망했던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중환자실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가래가 잔뜩 껴 숨쉬기도 어려워하시던 할머니께서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저를 향해 애정 어린 눈으로 “우리 강아지.”라고 속삭였던 그 순간.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할머니의 주름지고 깡마른 손을 열두 살의 저는 병실에 있는 내내 놓지 못했고, 장례식에서도 3일을 내 울었습니다. 아빠는 장남으로 상주석에서 건조한 무표정으로 견디다가 할머니의 입관하시는 마지막 모습을 보시고는 결국 참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그 병실에서 할머니께서 주신 만 원짜리 몇 장을 저는 여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오 년이 지나도록 말입니다. 저는 이토록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미련 덩어리입니다.


    그런 순간들은 대체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그러므로 기억 속에서만 꺼내어 볼 수 있기에 더욱 잊히지 않고 끝끝내 되뇌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하지만 소중하고 다디단 기억. 그 안으로 한 번씩 돌아가게 될 때면 저는 한껏 울거나 한껏 가슴이 먹먹해져 돌아옵니다.


    오늘도 스산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조금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몇 개의 별이 그날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여태, 여태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웁니다. 오늘따라 마중 나와주던 작은 고양이도 어딘가로 숨어버려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허기를 달래주면 곧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공허함을 달래주던 작은 고양이가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마음이 온통 닳아서 어떤 글을 읽어도 어떤 말을 들어도 금세 울게 되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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