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두 아이 모두 선천적 기형아를 낳은 엄마입니다.
강하게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 네 발을 만진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 이전에 나는 두 아이 모두 선천적 기형아를 낳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이력의 소유자다.
그래, 한 번은 그럴 수 있어. 근데 두 번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구순구개열, 둘째는 구개열.
기특이를 임신하고 7개월 초입 무렵 정밀초음파를 하면서 선생님의 얼굴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차가운 초음파용 젤을 배 위에 묻히고 이리저리 꾹꾹 아플 정도로 눌러보신다.
구순열이에요, 구개열도 보입니다. 아산병원 OOO교수님, 서울대병원 OOO교수님 잘 보시니까 미리 예약 잡으셔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구순열도 구개열도 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다.
그렇게 선생님 방을 나올 때 남편의 부축을 받았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눈물을 지하주차장까지 참고 차에 타자마자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울면 정말 내 아이가 잘못된 게 되어버리니까.
사연 있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이게 무슨 일이냐고, 왜 아이 입술이 안 붙었냐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남편에게 피를 토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가혹한 남은 임신시간을 채우고 나는 아이를 건강하게 자연분만 했다.
역시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아이의 얼굴은 왼쪽 코와 입술이 뚫려 있었다. 잇몸까지 일자로 손가락 하나가 비어있는 정도였다.
그 시절을 나는 어찌 보냈을까.
친정엄마는 내가 회사를 관두지 못하게 당신이 전담해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하셨다.
집에서 애만 보면 더 미칠 거 같을까 봐 너 회사라도 다녀라 하셨다.
다행히 정신없이 워킹맘 시절을 보내고 아이는 생후 79일을 시작으로 돌, 7살(사이사이 중이염 시술..) 때가 되면 해야 되는 수술을 씩씩하게 잘 받아주었다.
큰 아이와 어릴 때 추억은 병원에서 보낸 게 다여서 둘째를 가질까 라는 생각은 사치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 순간 나는 둘째 아이를 원하게 되었다.
사랑해서 낳았고 계획해서 낳았다. 첫째가 아들이었기에 둘째는 딸이면 좋겠다 막연히 생각했지만 내 팔자는 아들부자였다보다.
둘째는 형아보다는 나은 상태였지만 어쨌든 형아처럼 구개열이라는 이름으로 천장이 열린 상태로 나왔다.
다행히 겉에서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외관상 문제는 없었다.
그게 어디냐며 나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보지만 난 둘째를 낳을 때까지 아이가 구개열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낳고 나서 그 사실을 알려주는 간호사 선생님을 보고 절규를 하면서 두 번째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첫째의 구순구개열 사실까지 말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말이다.
의료진은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위로할 뿐 그 어떤 말도 실은 위로가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감사하게도 둘째는 한 번의 수술로 구개열과 관련된 수술은 모두 끝이 났다.
형아보다는 굉장히 심플하게. 이마저도 앞선 경험이 있으니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간단한 규칙처럼 심플하지 않다.
결혼 전 행복할 것만 같았던 내 신혼생활은 매일마다 안부전화를 원하시는 시아버지로 인해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원래 엄마아빠랑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안 하던 나로서는 안부전화는 참 신박한? 고문이었다.
시댁과 도보로 십분 거리에 집을 구했는데도 안부전화는 별개였다. 그 당시 맞벌이였던 우리는 걸어서 십 분이면 도착하는 지하철역에 아침마다 시부모님 내외는 집 앞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셨다. 그 짧은 거리 아들며느리 힘들까 봐 차로 데려다주신다는 명목하에. 하하. 나는 참 외적으로 보면 사랑받는 며느리였겠지? 하지만 그렇게 주시는 사랑만큼 받기를 원하셨고 모든 것이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길 원하셨다. 아무리 채워드려도 나는 이상하게 욕을 먹는 둘째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그저 네네 착한 며느리병에 걸린 죄밖에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시댁은 내 상식과는 별개로 참 이상한 나라였다.
여기에 다 풀 수 없는 기막힌 스토리들이 많지만.... 쓰다 보면 끝이 없을 거 같아서 말을 줄여야겠다.
그렇게 지옥 같던 시댁과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가졌던 첫째.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내 기쁨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기쁜 날도 있구나 싶은 기쁨이었다.
단순히 '기쁨'이라는 단어 안에 다 포함시킬 수 없는 황홀함 그 이상의 영역.
하지만 기특이가 구순구개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내 시간은 그때로 멈추게 되었다.
어찌어찌 시간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흘러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는 게 시간이지 않은가.
여기다가 풀 수 없는 여러 복잡한 일들로 나는 내 목숨 부지함에 무력감을 느꼈었다.
엄마니까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 죽기 싫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 라는 단순한 이론은 위태위태할 정도로 버티던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면 툭 하고 끊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진다.
가끔은 둘째의 올해 남은 이 시간이 정말 영원히 붙들고만 싶을 때가 있다.
언제 이렇게 컸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
네 얼굴에, 네 온몸에 돋아난 솜털이 빠지지 않기를...... 네 작은 코와 입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가끔 변태(?)같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난 뒤 매일 잠자리에서 껴안고 자는 국민템 토끼인형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아이 냄새가 배겨있다.
깊게 한 번 더 맡아본다.
이런 나를 가끔 남편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쳐다본다.
이러다 올가미2 찍겠군 썩소를 날린다.
그래, 나 올가미2 찍겠어 이러다가~ 후훗 맞받아쳐준다.
큰 아이는 이미 열 살. 형님이 되어 버렸고, 요즘 내 사랑을 듬뿍 받는 건 아무래도 여섯살 둘째다.
사랑의 크기가 다르지는 않지만 지금 이렇게 어린 유아기 시기가 얼마 안 남았음을 알기에..
첫째보다 둘째를 더 스킨십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신기하다. 아이들의 존재란. 정말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 때문에 살아지더라.
그 아이들의 존재감이 무서울 정도로 내 안에서 커지더라.
가끔은 나보다 더 크게 존재해서 무서울 때도 있더라.
너희들이 잘못되면 나는 정말 살 수 없겠구나.
그래서 아이를 잃은 사건의 부모님들 얼굴만 봐도 그렇게 코가 시큰거리는구나.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 마음을 알겠다.
사랑만 받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랬으면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