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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Oct 26. 2020

구름이 없는 날

행운과 마음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운이 없는 하루라고 느껴질 때면
내 밤의 구름을 걷어낸 그대가 떠오르네요.


그대는 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그대는 이 어두운 밤을 보지 않았으면 해.



성덕.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으로, 흔히들 계 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의 짧은 덕질 기간 동안 성덕의 순간이 여럿 있었다. 가볍게는 라디오에서 나의 문자가 읽힌 것 부터, 라디오 사연을 자주 보내서 어느 공연의 관람권을 얻기도 하고, 팬들이 주최한 이벤트에서 여러 상품을 받기도, 라디오 사연으로 내 가수의 응원이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 가장 큰 행운을 꺼내 펼쳐보고자 한다.


내 가수는 주 1회로 보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시청자와의 게임 대결을 통해 애장품을 주는 코너가 있었다. 전화연결 이런 거 사실 안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덕질을 짧게 하기도 했고, 왜인지 몇장이든 사는 앨범마다 그의 포토카드가 나오지 않아 그의 싸인이 남은 물건이 나에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싸인을 얻고자 말도 안되는 사투리 개인기(ㅋㅋㅋㅋ)도 할 줄 안다며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방송이 있던 날, 퇴근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000 라디오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라디오에서 문제를 내 주던 스텝분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라디오 코너 참여가 가능하냐는 전화였고, 나는 한 다음주 쯤으로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하고 있는데 당장 오늘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와 함께 다른 통화 연결 후보가 있고, 둘 중에 누구에게 연락이 갈지는 모른다고 하며 개인기가 가능한지 물었지만 나는 떨려서 못할 것 같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스텝분은 방송 시간대에 연락을 기다려 달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었다.

세상에. 미친 일이었다. 소심한 관종이라 관심받기 위해 행동하지만 정작 관심을 받는 건 싫어하는, 뭐 어쩌라고 타입의 나는 방송까지의 2시간 여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속이 울렁거려 밥도 먹지 못했다.

방송이 시작되고 코너가 시작하기 몇 분 전에 전화가 울렸다. 스텝분께서는 방송과는 화면 차이가 있어서 곧 연결될거라고 하셨고, 다른 코너가 끝날 쯤 내 가수와 전화 연결이 되었다. (사실 사투리 개인기 못한다고 해서 연결이 안될 줄 알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20여 분이 흘렀다. 내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니 떨려서 아무 생각이 없어졌지만 내내 올라간 광대는 내려올 줄 몰랐고, 그래서인지 다시 듣기로 방송을 들어보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는 바람에 발음이 잔뜩 뭉그러진 게 느껴졌다.

그 통화로 내가 알게된 것은 ‘퀴즈 프로그램은 못 나가겠다.’ 였다. 머릿속이 하얘져 문제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듣는지도, 하는지도 모른 채로 퀴즈를 풀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문제를 못 풀 것 같아서 미리 섭외해둔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문제 내용을 써서 알려줬다. 친구들은 열심히 답을 얘기해주긴 했는데 친구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사실 내 멋대로 내뱉은 말도 많았다.

정말 너무 떨려서 헛소리만 했는데도 내 가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 해주는 건지 나에게 양보해주고 모르겠다고 해 줬다.

그리고 퀴즈에 승리한 나는 일명 관계자템인 소속사 로고가 있는 쇼핑백과 2만원이 충전되어 있는 커피 멤버십 카드를 얻었다.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지만 나의 신상을 위해 비밀로 부친다. 그의 싸인이 갖고싶다고 하니, 그는 쇼핑백과 카드 모두에 싸인을 해서 보내주었다. 애장품을 받은 나는 덕분에 커피도 마신다고 인증샷을 올렸지만 사실 그 카드는 아직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카드를 쓰는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몇 번 그냥 써볼까 했는데 선뜻 내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카드를 쓰게 될 날을 정했다. 내 앞으로의 하루 중 가장 궁핍하거나 비참한 날에 쓰자고. 그럼 그 날이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되지 않을까?

내 생에 가장 비참할 날, 내 가수에게 커피 한 잔을 얻어마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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