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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007

시키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by 주원 Jan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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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은 가슴에 손을 얹고 절대로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으셨다. 당사자인 며느리 입장은 물론 다르다. 워낙 천성이 부지런하고 손이 야무진 어머님은 살림 대부분을 '이까짓' 일이 뭐가 어렵냐고 하셨다. 문제는 내가 세탁기 한 번 안 돌려 보고 된장국 한 번 안 끓여보고 결혼한 새댁이라는 거였다.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얼결에 살림을 합치고 8개월간 함께 사는 동안 어머님과 나의 동거는 쉽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에 진심인 분이시다. 미역국 하나를 끓여도 보드라운 느낌을 위해 불린 미역을 칼로 자르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찢으신다. 깨 송편을 빚으면서 반죽에 깨 한 톨 안 묻히시는 건 기본이다. 떡국을 끓일 때도 원하는 식감을 위해 가래떡을 뽑아 굳힌 다음 직접 써신다. 그러니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한 며느리의 소꿉놀이가 얼마나 한심하셨을지 뻔하다. 아침에 주방에 나오셔서는


"매생이 전 부치고, 불고기 볶고, 청국장 지져라." 하시는데,


 이건 뭐 미션 임파서블이나 다름없었다. 저 머리카락 뭉텅이처럼 생긴 것이 매생이라는 생물인가요? 지지는  또 뭔가요? 이제 막 중기 이유식을 만들어 본 나다. 내 칼질 소리 한 번 들어본 사람이라면 내게 라면 물 붓는 것도 안 시킬 거였다. 하지만 어머님은 며느리라면 당연히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계신 모양이었다. 보무당당하게 요리를 지시하셨고 나는 만들어냈다. 신기한 건 내 '요리'가  맛이야 어떻든 간에 (육안으로는) 시식에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밀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양념이 달다. 파도 빠트렸구나." 하는 품평이 한참 이어지기는 했다.


 고부관계는 매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기도 고 삐걱대기도 했다. 어머님은 자식에게 매우 희생적이신 분이지만, 나는 자식인 듯 자식 아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게 주시는 애정과 관심은 친 자식인 남편에 비하면 하늘과 땅이었다. 말로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세월이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우리 고부관계는 많이 달라졌다. 복잡한 사정상 거의 매주 보다 보니 몰라보게 편해졌다. 어머님이 서계시면 앉지도 못하고 옆에 서서 종종거리던 내가 어느 날은 어머님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편하게 잠든 나를 보며 어머님은 이불을 살포시 덮어 주셨고 남편은 집에 오는 길에 내손을 꼭 잡으며 따뜻한 말을 전했다. 편하게 있으란다고 편해지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을 거다. 내 집처럼은 아니어도 낮잠이 들만큼 어머님 집이 익숙해진 공간이 되었다는 게 어머님과 남에게 안도감을 준 것 같았다.


 더 좋아졌던 것은  차례를 그만 두면서였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첫제사를 시작으로 명절 차례상과 제사상을 어머님과 둘이 준비했다. 대부분의 일은 어머님이 하셨지만 옆에서 거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코로나로 명절 길이 막히고 차례와 제사를 없애 가던 다른 집들처럼 우리도 고민이 시작되었다. 가족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만드는데 며칠을 쓰고 정작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에서였다. 나와 어머님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남편의 배려였을 거다. 합리적인 생각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했지만 전통을 거스르는데서 오는 껄끄러움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님은 상에 올릴 만큼은 아니어도 음식 가짓수를 여러 개 준비하셨고 나는 도왔다. 그때부터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안 하기로 했으면 아무것도 안 해야지 이러면 차례 지내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거였다. 우리 가족 먹거리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어머님과 그냥 평소처럼 먹고 없으면 사 먹자는 남편의 줄다리기가 팽팽했다.


 어머님은 한동안 명절마다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셨고, 정성 들인 음식을 맛나게 집어먹으면서도 지청구를 놓던 남편의 힘겨루기는 결국 남편의 승리로 가닥을 잡아갔다. 남편의 비만, 어머님의 당뇨 이슈로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상호합의가 주효했다. 어머님은 몇 가지 음식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직접 하셨다. 송편도 미리 다 빚어놓으셨다. 막상 앉아서 먹기만 하려니 편치 는 않았지만 주방에 서서 일만 하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화기애애했다.


 지난 추석에 아이들과 둘러앉아 송편을 한참을 먹고 있는데 어머님이 깨가 부족하다고 하셨다. 손이 아파 죽겠다. 이거 빚느라 한나절이 걸렸다. (관절염이 있으시다.) 깨가 부족하다. 송편 반죽이 더 있다. 빙빙 둘러대는 말을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어리석은 나였다. 한참 후에야 눈치채고


 "아이고, 어머니 제가 깨 갈아 드려요?"

 "이이. 그럴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빻아드릴 테니 얼른 꺼내시라고 했다. 얼씨구나 신나서 깨를 대령하시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어머님은 송편에 깨도 그냥 넣지 않으신다. 검은깨를 절구에 아주 곱게 빻아서 넣는데, 깨를 빻다 보면 기름이 나와서 떡져버리기 때문에 한 번에 조금씩 넣어 기름이 나오기 전까지만 빻아야 한다. 어렵지는 않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흐뭇해하시면서도 깨 입자의 크기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시는 어머님 앞에서 나는 칭찬받고 싶은 아이처럼 열심히 빻았다. 빻기 시작한 지 5분이나 됐을까? 쿵쿵 소리를 듣고 나온 남편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얼른 깨봉지를 치우셨다.


"하이고 아들 눈치 보여서 송편도 못먹겠다." 말씀하시는 어머님이랑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함께 산 8개월,  8년 동안 함께 지낸 차례와 제사를 통해 어머님은 나에 대한 기대치를 많이 낮추셨다. 나 역시 웃으며 불평불만 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 남편도 엄마와 아내 사이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추는 노련함이 생겼다. 뒤돌아 눈물콧물 짜던 새댁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참 평화로운 명절이다 생각하며 추억에 잠겼는데,


 11시 방향에서 이상신호 감지.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소리, 얇은 비닐이 폴리 소재의 천에 닿으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 방심을 틈타 다가오는 불상한 움직임에 레이더가 요란하게 붉은빛을 내뿜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야. 어미야. 아들 잔다. 깨 빻자"


 봉지의 재등장으로 사건은 새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과연 시키려는 자의 성공으로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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