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낭비가 최대의 미덕이다', 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생산자가 ‘낭비인 것들’을 만들어내지 않고 소비자가 '낭비 행위'들을 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도 함께. 다시 말하지만 소비가 아닌 '낭비'다. 낭비가 미덕이라는 것이다. 소설이 발표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고도 자본주의는 착착 몸집을 키워 당시보다 더욱 세분화되고 치밀해진 '초고도 자본주의'가 되었다.
사람이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자본주의라는 물로 채워진 어항 안에서 소비와 낭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살고 있다. '하울'과 '플렉스', '내돈내산'이 일상용어가 되었고 때론 낭비를 낭비로 느끼지 못하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저건 사야 해!'를 중얼거리며.
소비와 낭비의 구분 기준은 '꼭 필요한가, 아닌가'라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겠지만 이 기준은 가끔 나를 헷갈리게 한다. '필요하다'는 개념에 확실한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심리적 위안을 위해서만 필요한' 경우가 꽤 많이 있다. 따라서 필요한가 아닌가를 약간 수정해 적용하는 내 기준은 '구매 후 쾌감이 있는가 없는가'가 되었다.
예를 들면 화장품이 떨어져서 화장품을 산다거나,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보온용 내의를 산다거나, 외출 시 갑자기 비가 내려 우산을 사는 등의 구매행위는 쾌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걸 또 사야 되나 싶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슈퍼에서 생필품들을 카트에 담으며 쾌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멀쩡한 핸드폰을 신형 모델로 바꾼다거나, 서랍 속에 쓰지 않는 펜이 수십 개 잠들어 있는데도 디자인이 살짝 새롭다는 이유로 새 펜을 사버린다든가, 비슷한 셔츠가 있지만 미묘하게 색이 다르다 싶어 충동구매할 때는 쾌감과 함께 예의 그 ‘낭비의 미덕’을 체험한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렇게 새 지우개가 계속 갖고 싶던지, 사고 사고 또 사도 지우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우개를 끝까지 다 쓴 후에 사는 것과 쓸만한 지우개가 많이 있는데도 또 새것을 사는 맛의 차이는 완전히 달랐다. 인스턴트식품과 유명 맛집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값을 치르고 막 손에 쥔 새 지우개는 딱 그 지우개 만한 크기의 쾌감을 선물했다. 고도 자본주의가 초고도 자본주의로 덩치를 불리는 동안 '지우개 욕망'도 나와 함께 성장하여 슬쩍슬쩍 형태를 바꾸어가며 내 안의 새로운 소유욕들을 키워나갔다. 성장기의 아이에게 일 년만 지나도 한창 입던 바지가 작아져 버리듯 좀 더 사이즈가 큰 바지에 꾸역꾸역 자라난 물욕을 끼워 넣어야 했다.
낭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낭비하기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아름답고 덕스럽지' 못한 것일까.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유명 만화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던 환경에서 자라면서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는 욕망들을 그림으로 대체하면서 더욱 훌륭한 실력을 갖추어 갔고 결국은 물건보다 더 큰 것들을 소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낭비가 최대의 미덕이라는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초점이 사람이 아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람과 지구에게 낭비란 결코 아름답고 덕스러운 미덕이 아니다. 가끔 사회고발 프로그램 등에서 쓰레기로 뒤덮인 집이 등장할 때가 있다. 어떻게 저기서 숨을 쉬며 살아가지 싶은 마음과 함께 곪아가는 지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서늘해진다.
내 안의 지우개 욕망은 이제 잠재울 때가 된 것 같다. 딱 지우개 크기만큼의 위안을 주는 그 욕망들은 예의 그 만화가처럼 그림으로 그려 마음에 간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욕망의 저장공간을 축소하거나 처분할 시점이다. 몇 안 되는 선택받은 인류들만 다른 별로 도피하는 미래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지구를 먼저 치유하는 것이 나으니까. 진정한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