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란 지도를 펼치다
'정'이라는 것도 옛말이다.
'정'보단 '조건'과 '이익'이 우선인 현실.
자기 감정 우선 시대,
그래도 살아야 한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된 시기도 아니다 보니 아날로그적인 요소들이 꽤 많았다. 핸드폰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전화통화와 메시지 전달을 주로 할 때만 사용했고 대부분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며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학습지 공부를 많이 했다. 학교 친구들과 같이 한 방에서 공부를 하며 교감을 나누고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고 싸우기도 했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나중엔 서로 사과하면서 더욱더 끈끈한 정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정'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자연스럽게 정을 나누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며 함께 놀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정'이란 단어를 몸소 느꼈던 것이다.
옛날에는 놀이터에 모래가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모래를 만지면서 소꿉놀이도 하고 모래성도 쌓아가며 즐겁게 놀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다오...' 를 노래하며 두꺼비집을 짓기도 했다. 모래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에서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개인적으론 어릴 적에 모래를 가지고 놀았을 때가 좋았고 동네 친구들과 모래로 다양한 놀이를 하며 친해지면서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싸움이나 물놀이를 할 때처럼 모래 가지고 서로 장난치고 놀기도 했다. 단순히 모래가 비위생적이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만연한 시대에 자연스럽게 정을 주고 나눌 수 있는 도구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은 예전보다 더 편해졌다. 굳이 전화를 하지 않아도 메세지나 카톡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대화가 없어도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일처리가 가능하다. 코로나 사태를 겪은 이후부터는 비대면이 익숙해지다 보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더더욱 사람들과 마주보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를 직면할 필요도 없어졌다. 기술은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인하면 또 '정' 아닌가? 서로가 '정'을 주고받으며 어려움을 이겨나가야만 했던 과거를 지나 한강의 기적을 이뤄 기하급수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낸 나라 대한민국. 개인적으론 한국인의 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정'이 없는 곳은 없다.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직장에도 '정'이란 게 있다. 흔히 말하듯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하고 직장을 다닌다고 하지만 엄연히 직장도 '정'이 통하는 곳이다. 보이지 않는 물이 흐르듯이 '정'의 흐름 역시 존재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업무 능력이 향상되고 직장 동료들과 친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이 쌓이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정'을 주고 받는다. 직장에도 '정'이 있듯이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학교에도 '정'이 있다. '정'이란 게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서 경험을 공유하거나 지속적인 교류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단체활동이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별히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독 그 사람을 더 알고 싶다거나 뭔가를 함께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마음이 '정'의 출발점이 되어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정'의 영향력과 범위는 점차 확대된다.
요즘 들어 글을 쓸 때마다 답이 있는 공부와 답이 없는 공부에 대해 자주 떠올리게 되는데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때는 답이 있는 공부를 할 때마다 마음이 안정되고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근데 그러한 생각 때문인지 감당하기 힘들거나 낯선 상황과 마주했을 때 자꾸만 피하고 싶은 생각과 감정에 좌우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굳이 내 스스로가 힘들게만 느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할 이유가 없으니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성장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미래를 펼쳐나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청을 잘해야 하고 경험많은 사람들의 조언이나 훈계를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데 그 부분에 있어서 받아들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흔히 미운 정 고운 정 얘기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운 정보단 고운 정을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게 더 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흔히 '정'을 얘기하면 '고운 정', '따뜻한 정'을 떠올릴 것이다. 사람에 대한 애착, 물건에 대한 애착을 뛰어넘는 깊이 맺힌 따뜻한 마음과 애정을 '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있어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을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고생들을 하면서 서로에게 불만을 표하거나 다툼이 있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서로의 의견 충돌로 인해 좋지 않은 감정들을 느낄 수도 있고 아예 상대방의 행위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갈등과 다툼은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한때는 갈등과 다툼이 발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갈등과 다툼없는 관계는 없다. '정'도 마찬가지다. '고운 정', '따뜻한 정'만 있는 게 아니라 '미운 정'도 있다.
어떻게 보면 답을 찾는 공부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이 인간관계의 갈등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은 저마다 다른 성장배경, 생각, 문화적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나와 동일할 순 없다.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하며 성격까지 90% 이상 동일한 사람을 찾기란 힘들다. 처음에는 힘들고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조금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이 쌓인다. '미운 정'이 특히 그렇다. 누군가에게 혼나거나 지적을 받았던 기억들, 내 실수로 인해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하였거나 상대방의 실수로 인해 마주한 좋지 않은 상황들. 그런 상황들이 오지 않기를 원했지만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갈등과 이슈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정'이 통하려면 당연히 좋은 기억과 즐거웠던 기억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친구들과 만나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누군가의 실수나 실패를 얘기할 때가 더 많다. 그러한 실수나 실패를 거쳐 현재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정'에 대한 깊이도 더해진다.
틈날 때마다 유튜브를 통해 과거 90년대의 일상이 어땠는지를 보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많이 다르다. 근데 왠지 모르게 정겨움이 느껴졌다. 물론 그 정겨움이 단순히 '미운 정 고운 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만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느껴진다. 지금처럼 사회 인프라가 많이 발전한 시기는 아니였지만 불평하지 않으며 묵묵히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스마트폰과 유튜브가 없던 시절, SNS와 인스타그램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90년대의 감성과 2025년의 감성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멀어지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더 멀어진다고 했던가?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끈끈했던 90년대의 '정'은 분명 2025년의 '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정'의 깊이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깊어지고 있는 듯 하다. 차마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90년대의 '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갔다. 스마트폰과 SNS는 사고방식과 시대감성에 엄청난 변혁을 일으켰다.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를 내 손에서 자유롭게 다루며 지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완전히 다른 차원의 놀이터를 제공해준 셈이다. 모래를 만지지 않아도, 굳이 놀이터를 나가지 않아도 사이버 환경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자신들만의 소꿉놀이와 술래잡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사이버 정', '가상의 정'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정'이 존재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정'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입시 교육에 최적화된, 업무에 최적화된, 요즘 트렌드에 최적화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낀 점은 학력이나 경력, 업무 능력은 최적화가 가능하지만 '정'과 관련된 감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논리적인 접근이 힘들고 특히나 최적화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희노애락이 어우러지며 성공, 실패, 실수가 한데 모여 끈끈하게 형성되는 것이 '정'이다. '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존재하지만 '정'의 본질만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은 '이익'이 아니다.
'정'이 존재하기에 사람냄새가 나는 세상이 있으며
'정'을 주고 나누었기에 지금의 일상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정'의 거리는 기술로 대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