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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잊혀 가는 길’
중장년층을 위한, 서울 걷기 여행 책을
쓸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말씀에 사실 어리둥절했다. 아직 책을 출판할 정도의 실력이나 경험이 미천한 나에게, 출판사 대표님이 쓰윽 제안을 하신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가 가속화되면서 그들의 여가문화가 더욱 중요해질 텐데, 중장년층을 위한 콘텐츠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 보다. 그보다 더 나아가, 그들 세대에서 감성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서울 근교 여행책을 만들기를 원하셨다.
팀장님은 걷기를 많이 하시잖아요?
게다가 글도 잘 쓰시고. 무엇보다, 그 나이대에 그런 감성을 가진 분은 드물어요.ㅎㅎㅎ
이런! 굉장한 칭찬이긴 했지만, 느닷없이 스트레이트 몇 방을 맞은 기분이었다. 당혹스러움과 쑥스러움 사이에서 잠깐 으쓱해졌다. 하지만 책 한 권 내보지 못한 나에게 이런 칭찬이 과연 합당할까? 스스로에게 던진 그 질문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제가 여행책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서울을 많이 걸어보겠습니다.
여기저기 많이 걸으면서 남들이 모르는 좋은 곳도 찾아가고, 보물찾기 하듯 숨겨진 맛집을 소개하는 책. 그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말씀에, 나는 부지런히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서울 426개 동네 중 절반 이상을 걸었나 보다. 특정한 동네를 목표로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목적 없이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쳐 간 곳들이 많았다. 동네 하나하나를 걸으며 그곳이 내게 주는 느낌을 찾는 데 몰두하다 보면, 결국 그것이 남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을 소개하는 일을 ‘목적’을 가지고 하려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프레임을 고민하고, 다른 책들과 차별화할 방법도 나름 기획해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특히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어가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에세이스트로서 정보책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그곳의 기억을 가져오는 일이 익숙하다. 익숙한 것이 곧 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억을 사진에 담고 글로 풀어내는 과정이 좋았다. 그리고 서울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먼지 한 톨까지도 그의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일이 행복했다. 내가 행복해야 내 글도 행복해지고, 결국 내 글을 읽는 분들도 함께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서울 도심을 걸으며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내가 느끼고 좋았던 것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정보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다시 앞으로 1년 동안 서울 몇 개의 동네를 걸어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 동네를 걸어가는 길에 많은 다른 동네를 거쳐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나러 가는 그를 두고 지나쳐 가는 다른 이마저 나의 동네로 리스트 하기에는 낯간지럽다. 나는 나의 서울을 구석구석 보기를 희망한다.
사라져 가는 낡은 마을을 탐방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일원동의 ‘대청마을’도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져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그런 옛 마을들이 아직도 서울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곳을 걸어 들어가,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그들이 간직한 이야기를 담아와야겠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풀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숨이 헐떡거려 뛰는 가슴보다, 설렘이 주는 가쁨이 좋다. 지난 한 해도 나는 미친 듯이 걸어 나에게 메달을 안겼는데, 나는 또 앞으로 펼쳐질 멋진 여행으로 행복의 메달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서울을 구석구석 탐방하기로 했다. 미친 듯이 걷기보다는 미친 듯이 아름다운 서울을 위하여.
- 제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