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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왕의 가운뎃손가락 길이는

-박연(1378~1458)

by 정영의 Mar 07. 2025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왕의 손가락 길이로 음률(音律)을 정한다.’         


열하일기에서 처음 읽었어요. 손가락이 왜? 더구나 가운뎃손가락이 왜? 이 손가락이 욕으로 종종 쓰이는 시대에 오해하기 딱 좋게스리? 으레 다 아는 이야기인 듯 연암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나는 인터넷에 폭풍 검색을 했지요. 그리고 국악 관현악단 지휘자에게도 질문을 던졌어요. 


"왕의 손가락 길이로 음률을 정한다는 게 뭐에요?"          


그분이 대답했지요. 중국은 왕의 가운뎃손가락 길이에 따라 기본음을 정했다고요. 그러면 천자가 새로 즉위할 때마다 때로는 '레'가 때로는 도#이, 심지어는 미가 기본음 '도'가 되나요? 그러면 악기의 제작 방법이 달라지고 따라서 기존의 악기를 죄다 바꿔야 하지요. 지휘자님이 '중국이 그렇게 무식한 짓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청중들이 다 웃었어요. 그냥 하던 대로 놔둬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만 잡으면 교과서를 개편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   

 

기타리스트는 다 알아요. 기타는 종종 튜닝을 해줘야 합니다. 기껏 튜닝을 해놔도 줄이 풀려 또 해야 할 경우도 생기겠지요. 그럴 때에 대비하여 지니는 물건이 바로 튜너입니다. 이런 휴대용 튜너가 나오기 이전에는 음을 어떻게 튜닝(조율)했을까요? 특히 국악에서는요? 놀랍게도 고대 중국에도 튜너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율관(律管)인데 원통형의 관(pitch pipe)이었어요. 이미 기원전 3C에 율관이 언급되었다고 하니 음악이 아주 이른 시대부터 종교적, 정치적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처음에 황종율관을 만듭니다. 황종율관이 기준음이에요, 이를 바탕으로 율관 11개를 마저 제작합니다. 12음률이지요. 율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율관의 길이입니다. 길이를 어떻게 잡아야 적당할까요? ‘기준’이 없던 시대에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야 할까요?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전설적인 나라인 하나라의 황제 우(BC 2100~BC 2000)의 말이 음률이 되고 몸가짐이 법도가 되어 ‘저울’이 만들어졌답니다. 율관은 음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동시에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이었던 겁니다.      


통치자들이 율관 제작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를 아시겠지요.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상징하니 음률은 단순히 소리[音高] 이상의 것이었지요. 율관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는 우 임금의 가운뎃손가락 길이에 맞춰 정했답니다. 그런데 송나라 시대에 이 율관이 휘종임금의 가운뎃손가락 길이에 맞추어 변경된 거에요. 그 손가락이 우임금의 손가락보다 더 길었으니, 율관이 길어지고 악률은 높아지고 말았지요. 율이 높은 건 북방 음악이라 북쪽이 요란하면 천하에 변이 생기리라고 담당자는 예상했답니다. 과연 그 음악이 완성되자 ‘정강(靖康)의 화’가 일어났다는 거에요.      


음률은 또 천지자연의 수와 일치해야 해요. 그러니까 율관을 제작하는 데에 자연물인 기장[黍]과 대[竹]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율관 여러 개에 대나무를 태운 재를 넣었습니다. 그것들을 동지(冬至) 무렵에 땅에 묻었어요. 그중에서 재가 땅 밖으로 드러난 율관이 황종율관이 됩니다. 이걸 후기지법(候氣之法)이라 하는데 일 년 열두 달의 절기에 따라 음률을 정하는 방법이지요. 자연이 음률을 결정한다니 날씨의 변화에 따라 결과가 오락가락하지 않았겠어요? 불편하고 불만도 많이 나왔을 터이구요.     


그 뒤에 나온 방법이 이서정률법이었어요. 이것은 기장 낟알을 쌓고, 이를 기준 삼아 율관의 길이를 정하는 방법이에요. 조선의 음악 전문가 박연도 이 방법으로 율관을 제작했답니다. 1425년(세종 7) 즈음에 황해도 해주에서 찾아낸 기장[秬黍] 낟알을 기준으로 황종율관을 만들었어요. 이것이 중국 아악기와 비교하니 맞지 않아요. 실패한 것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가뭄 탓에, 기장 낟알의 크기가 작았던 겁니다. 드디어 1427년(세종 9)에 중국 편경의 황종에 맞추어 밀랍으로 기장 낟알 모양을 만들어 율관을 제작합니다. 


경기도 남양에서 채취한 ‘소리 나는 돌’, 경석(磬石)으로 아예 편경(編磬)도 만듭니다.  세종 15년(1433년) 1월 1일 박연은 편경 소리를 임금에게 들려줍니다. 임금은 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도 경석 하나의 소리가 약간 높다고 지적합니다. 문제의 경석을 살펴본 박연은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다'고 대답합니다. ‘가늠한 먹이 남아 있다’는 건 재단할 때 그었던 먹줄 두께만큼 덜 갈렸다는 뜻입니다. 먹줄 두께는 0.5㎜로 한 음의 1/20 오차가 난답니다. 이걸 알아차린 세종임금이야말로 요즘 말로 절대음감의 소유자였지요.    

   

송나라 휘종의 음악이 망국의 길로 이끈 데 비해 세종의 음악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엽니다. 세종은 아악(雅樂)을 정비하고 조선 선왕(先王)들의 공덕을 기리는 신곡을 만들되 고려가요를 활용하고 거문고 같은 조선 악기도 포함시킵니다. 임금은 말했습니다. '우리 음악이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중국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다 바르다고만 하겠느냐.' 휘종의 음악은 받아들여도, 기준을 변경하는 무식한 짓은 본받지 않아 망국이 아닌 건국의 기틀을 세우는 음악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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