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심씨네서(7일째)
아침 설거지 후 집안을 둘러보니 길심씨가 금세 사라졌다. 아침에 한나절 일을 하고도 모자라 길심씨는 또 밭고랑에 앉아 있다. 나도 모자를 쓰고, 팔 토시를 하고, 목장갑을 끼고 중무장을 하고서 길심씨 맞은편 밭고랑에 앉았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은 우람한 소나무 아래 들깨 밥에서는 사각사각 호미로 흙을 긁어 밭 매는 소리와 길심씨의 살아온 옛이야기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어찌나 총기가 가득한 지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베갯머리 송사"가 아니라 '밭고랑 송사'가 아닐런가. 대부분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송사니 처음 듣는 듯 추임새도 넣어가며 듣는다. 밭고랑에 앉으니 지나쳤던 이야기들이 더 잘 들리고 속으로 눈물도 찔끔찔끔 삼켜진다.
한낮의 해가 뜨거워지고 성수씨의
"난의 엄마, 난희 엄마, 얼른 오랑께. 뭣한가?"
화난 듯 거친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오니 성수씨가
"너도 밭맸냐? 느그 엄마는 뭣한다냐? 더운디 큰일 날라고."
한다. 나는 얼른 길심씨가 만들어 놓은 우뭇가사리묵에 콩국을 부어 점심상을 차렸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큰 냉면기에 담긴 한 그릇을 싹싹 비운다. 노동후의 식사는 달기만 하다. 점심 설거지를 하며
"엄마, 이제 한숨 자잉"
"이잉. 알았다."
길심씨의 낮잠은 짧다. 또 밭고랑으로 갈까 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 놀러 가세."
"그래 좋다. 가자."
성수씨는 벌써 옷을 입고 나온다. 마당에 있던 길심씨도 다시 들어가 옷을 바꿔 입고 나온다.그리하여 영암의 덕진 차밭으로 향했다. 월출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차밭에 도착했지만 성수씨는 별로 감흥이 없다.
차에서 내리지도 않는다. 길심씨랑 내려서 찻잎도 한 장 떼서 질겅질겅 씹어보고 사진도 찍었다. 길심씨가 걸음을 멀리까지 옮길 수 있다면 차밭 전망대에 올라 월출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련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영암의 풍력발전소로 코스를 다시 잡았다. 발전소로 들어서 높이 오르니 거대한 풍력발전기와 깊고 깊은 산 풍경은 차치하고 오늘따라 온 하늘에 하양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길심씨는 연신 흥분해서
"저기 저기 좀 보쑈잉. 우리가 꼭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소잉. 오매, 멋지요잉."
"그랑께. 참말로 잘 해놨네."
"아버지는 여기 처음이제잉?"
"그라제, 호동 사람들 아무도 여기는 안 와 봤을거여."
길심씨의 흑산도 팔순 여행 후 성수씨는 여행에 맛이 들렸다. 내일은 어디로 갈거나...
차머리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암 오일장에 들렀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
"엄마, 장에서 뭘 살 건지 얼른 생각하셔야지."
성수씨는
"오리를 사야제."
길심씨는
"안 해, 나는 장어를 살랑께."
나도 한몫
"나는 오리도 좋고, 장어도 좋네."
"그래도 오리가 맛있제.""오리는 싫어, 요리할라면 힘들당께."
길심씨가 장어전으로 곧장 가보니 아뿔싸! 오후 5시가 아직 안 된 시간인데 시골장에서는 벌써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남은 장어는 트럭에 실었다고... 이쯤에서 오늘의 오리 vs 장어, 장어 vs 오리에서 오리가 승이다. 길심씨는 성수씨가 가장 좋아하는 오리탕을 끓이기 위해
"에헤~쯧쯧"
하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면서도 배가 갈라진 채 시장에 누워 있는 커다란 오리 한 마리를 샀다.
오리탕 전문가인 길심씨는 집에 오지 마자 장독대의 항아리에서 잘 갈무리해둔 토란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