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멀게만 느껴졌다. 봄가을에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한여름에 뙤약볕을 걸어가는 것만큼 고된 일은 없었다. 우리는 더위를 잊고자 놀이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색깔 찾기 놀이를 가장 많이 했다. 술래가 색을 말하면 가방이나 옷에서 그걸 찾아내는 거였다. 나는 ‘상아색, 민트색’ 이런 이름의 색들이 제법 고급스럽다고 느꼈다. 놀이에서그 색이 뭔지 몰라 쩔쩔매는 아이라도 볼 때면 나 혼자 괜한 우월감에 젖어 뿌듯해지고는 했다.
이런 놀이도 폭염에는 이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신촌 초입의 두꺼비집이 있는 작은 원두막까지 겨우 걸어갔다. 원두막은 원체 작아서 그늘이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앉지도 못하고 그늘을 반쯤 걸치고 들어가 원두막에 기대어 섰다. 쉬면서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꾸역꾸역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걸어가고는 했다. 신촌부터 반고개째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 그나마 신촌길이 나았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요행을 바라며 차를 기다렸다. 주로 두꺼비집 아래에서 기다렸다. 동네를 향해 들어오는 차가 보이면 일렬로 줄을 서서 최대한 가방이 무거운 척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누군가 ‘하나 둘 셋!’ 하면 자동으로 함께 외쳤다.
“태워주세요!”
때로 마전이나 금산에 다녀오는 동네 어른들이 타고 계셨다. 그러면 남은 자리에 우리를 태워주셨다. 이것도 운이 좋을 때 얘기다. 대개는 차가 잘 들어오지 않았을뿐더러, 들어왔다 해도 신촌에 사는 사람일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태워주세요’를 외쳤는데도 그냥 지나가는 차 뒤꽁무니에 대고는 악을 쓰며 소리쳤다.
“가다가 빵꾸나 뽕나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항상 들었던 말이라 ‘태워주세요’와 함께 자동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야박한 차를 골탕 먹일 준비를 했다. 바닥에서 못이나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아 시멘트 도로 한복판에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에 돌아 나오는 차바퀴가 펑크 난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우리는 타이어가 꼭 펑크 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속풀이 놀이에 가까웠다.
그날도 불타는 더위에 녹초가 되어 두꺼비집을 지나 신촌까지 겨우 걸어갔다. 언제 차가 들어오려나 기다렸지만 영 소식이 없었다. 그때 신촌 애들이 바닥에 장애물을 만드는 게 보였다. 우리는 길가에서 주운 것들로 대충 만들었는데 이 아이들은 뭔가 더 조직적이고 위험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가져온 벽돌과 찌그러진 깡통 따위를 쌓아놓았다. 형체가 반쯤 남아있는 깨진 유리병도 보였다. 쟤네들은 집에 다 와놓고 할 일이 정말 없나 보다 하며 지나치고 있었다.
그때 우리 동네로 들어갔던 차가 나오며 우리 옆을 스치던 차에 ‘딱’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모두 차로 시선을 돌렸다. 곧 차가 멈춰 섰고 운전석에서 아저씨가 내렸다. 그 아저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한 아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바싹 겁에 질려서 가던 길도 못 가고 무슨 일인지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듣고 보니 동생네 반에 짓궂은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나오는 차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었다. 돌에 맞아 차 앞 유리에 금이 갔다. 그 아이의 당황한 표정과 아저씨의 화난 표정이 대비되어 지나가던 우리도 함께 얼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뒤에 신촌 동네 어른들이 나오고 그 아이의 어머니도 나왔다. 딱히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를 살피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슬쩍 집으로 향해 갔다.
우리는 그 아이 걱정으로 더위도 잊고 말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들을세라 바짝 붙어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를 소곤소곤했다. 어느새 금방 집에 도착했다. 이 뉴스를 다른 식구들에게도 알렸다. 그 아이와 같은 반인 내 동생은 걔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그 사건은 벌써 전교생에게 소문나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백 명도 안 되기는 했다. 그 차를 수리하는데 백만 원이 든다고 했다. 내 기준에 그 비용은 셀 수도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차를 새로 사줘야 할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차 한 대는 도대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아마 집 한 채쯤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뒤로 한동안 우리는 ‘가다가 빵꾸나 뽕나라’를 소리 내어 외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