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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Jun 05. 2024

그날의 단상

  금산 인삼제의 사생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어머니가 추석빔으로 사주신 풀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그 옷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화판이 커서 거추장스러웠지만 수업을 빼고 대회에 나간다는 게 마냥 신나 무거운 줄도 모르고 학교로 향했다. 곧 몇몇 아이들과 선생님을 따라 금산으로 출발했다.


  금산 시내에서 선생님이 우리에게 점심으로 자장면을 사주셨다. 다 먹고 대회장으로 갔다. 주어진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눈 깜짝할 새 학교로 돌아와 있었다. 운동장에는 막 돌아온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학교 살림을 도맡아 하셨던 오 씨, 송 씨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대게는 늦게 끝나는 사람을 서로 기다려주며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할 일이 많다고 학교가 파하는 대로 곧장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가야 했다. 나는 집에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다.


  신촌까지는 탁 트여있어 그런대로 갈만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인가도 없고 사방이 산과 밭뿐이라 슬슬 두려워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예전에 동네 사람이 간첩을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간첩이 무슨 외계인이라도 되는 양 간첩 얘기만 나오면 오금이 저렸다. 당시에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반공 포스터 그리기를 했다. 김일성을 도깨비로  표현한 아이가 금상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실제로 도깨비를 봤다는 아이도 있었다. 택시 운전하는 큰아버지는 열두 시 넘어 ‘반고개째’ 고개를 내려오다 귀신이 차 문을 잡아당겨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평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보다 사위가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어두워졌다.


  겨우 ‘반고개째’에 올랐다. 전부터 ‘반고개째’ 바위 한가운데 금이 가면서 그 사이에서 간첩이 나오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떨쳐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무서운 상상이었다. 뒤에서 자꾸만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면 그사이 앞을 딱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뒤를 마음껏 돌아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쯤 얼이 빠져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랜말’ 초입에 들어섰다. 이제 곧 우리 동네였다. 앞산의 무덤이 마지막 고비였다. 그 앞을 뛰어 내려가다 담벼락을 꺾으면 바로 동네 한복판의 느티나무가 기다릴 것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마지막 힘을 모아 무작정 뛰어 내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드디어 느티나무 앞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바로 보이는 우리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안도감이 들었다. 밤이 내리고 있었다. 밖이 잘 보이지 않아 오늘 들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렇게 무서웠던 마음은 어느새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우리 동네가, 우리 집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 꺼진 집에 혼자 있자니 슬금슬금 불안감이 밀려왔다. 가로등이 있는 다리로 나가볼까 하던 참에 아버지의 경운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냉큼 대문으로 나가 가족들 맞을 준비를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일하러 가지 않아 미안하면서도 은근히 신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집에 오자마자 저녁 준비로 분주하셨다. 다른 식구들도 각자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나는 큰상을 펴고 아버지와 어머니 자리에 숟가락을 놓았다. 나머지는 뭉뚱그려 쟁반에 올려놓았다. 저녁상 앞에 둘러앉고 나서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금산에서 먹은 자장면 얘기를 했고, 언니와 동생들은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느라 밥상머리는 시끌시끌했다.

  시끄러운 소리도 음악처럼 들렸다. 된장으로 비빈 밥에 물을 말아먹는 셋째의 요상스러운 밥그릇마저도 정답게 느껴졌다. 드디어 집에 왔구나. 그제야 두 다리를 쭉 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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