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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23. 2018

너와 내가 각자역할을 다 할 때 세상의 톱니바퀴가 돈다

#단상

<너와 내가 각자의 역할을 다 하는 것에 대한 단상>

    항시 한국행 여정을 준비할 때면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바로 '선물'.
    지인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문제는 개수 제한이 있는 선물은 우선순위를 매긴 뒤 리스트를 따로 정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가장 신경이 쓰이는 품목은 바로 '술'.
    중국 백주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백주 선물을 기대하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
    이번 백주 선물의 우선순위를 적어 보자면, 전주에 있는 나의 브로들과의 술자리 모임 1픽, 술을 못 마시는 장인어른 대신 술친구가 돼 주는 처 작은아버지 김진덕 슨상님 2픽, 대학 절친 4인방 3픽, 전북본부 슨배들과 후배들 회식용 술 4픽, 울아부지 혹은 엄니 5픽 정도랄까.
    이 순서는 중국에 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인가, 술자리에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사람인가, 인간적 도리가 필요한 분들인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정한다.
    이번 한국행 선물용 술은 일반인들은 아예 구할 수 없는 중국외교부 귀빈 접대용 술인 '외교사절단주'로 골랐다.
    포장에는 외교사절단주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 내용물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명주 '우량예'그룹에서 만들어 외교부에 납품하는 술이다. 보통은 중국외교부에 친분이 있는 관리를 통해 주문하는데 선물용으로 미리미리 모아둬서 집에 꽤 많이 가지고 있다.
    운이 좋아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중국 10대 명주를 모두 마셔 봤지만, 이 술만큼 무난하고 짝퉁 걱정 없는 술이 없어 손님을 접대할 일이 있으면 항시 들고 나가는 술이다.
    이번 한국행 이후에는 아마도 귀임 전까지 한국에 갈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조금 무리를 해서 외교사절단주 4병을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김영철 아재를 기다리다가 정신없이 뱅기에 올라타서 생각해보니 나 혼자 가져갈 수 있는 술은 달랑 1병 아닌가.
    '새벽 뱅기니까. 걍 무사통과 되지 않을까?', '아냐. 아냐. 분명 노란 잠 열쇠가 채워져 나오겠지?', '옆 사람한테 부탁해볼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그래 정공법으로 가자.고 결심하고 승무원분께 세관 신고서를 하나 달라고 했다.
    물품 신고란에 '술(52도)-4병'을 적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해졌다.
    뱅기에서 내려서 한국 땅을 밟았다는 기쁨도 잠시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심장이 지멋대로 날뛰는 것 아닌가.
    짐 찾는 곳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 멀리서 돌돌돌돌 하고 나오는 술병이 든 캐리어가 보이자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더 날뛰었다. 다행히 술을 4병이나 실었는데도 세관 점검을 요한다는 의미의 노란 잠 열쇠가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나는 짐을 낑차 들어 빼낸 다음 캐리어를 끌고 입국 게이트 직전 오른편에 있는 세관 부스로 갔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 삭개오 같이 생긴 분이 계신 세관 부스로 쭈뼛쭈뼛 다가가서 똑똑 유리를 두드리고 말을 건넸다.

    "저…. 음주 신고 아니 술 반입 자수하러 왔는데요"
    "네? 자수요?"
    "아. 그 술을 많이 가져와서요."
    "아. 신고서 작성하셨죠? 물건이랑 여기에 꺼내 놓으시면 됩니다."
    "(주섬주섬) 여기, 여기, 여기, 여기요"
    "아이고, 많이 가져오셨네요. 근데 이게 무슨 술이에요?"
    "이게 중국외교부에서 나오는 술인데 (블라블라….) 선물 받은 겁니다"
    "아…. 그럼 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이게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쯤 하면 좋을까요?"
    "우리도 처음 보는 술이고, 목록에도 없어서 참 곤란하네요."
    "그럼 한 200위안 정도 어떨까요?"
    "선생님, 이거 52도라 세율이 117%에요. 잘 생각하고 답을 해주세요.(찡긋)"
    "그럼…. 100위안 어떨까요?"
    "하하하. 그럼 세 병 각각 100위안 할까요?"
    "그럼. 다 합쳐서 6만원인가요?"
    "다 내시려고요? 자진신고하셨으니까. 한 병값만 내시고 가십쇼. 참 드문 일이라 우리도. 하하하"
    "하하하. 그래도 돼요?"

    세관 데스크 뒤편에 마련된 자동 수납기 앞에서 중국인(?) 티를 팍팍 내며 문송이 짓을 하고 있으니까 아까 그 삭개오 아저씨가 오셔서 이래저래 하시면 됩니다. 알려 주시고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하하하.하고 헤어졌다.
    맘 같아서는 한 병 드리고 싶었는데 술마다 다 주인이 있어 드릴 수는 없고, 그냥 연신 고개 방아를 찧으며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나와 렌터카 사무실 앞에서 직원분이 출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 세관 부스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나면서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게 아닌가.
    나는 내가 해야 할 책무를 다 했고, 삭개오 아저씨도 본인의 재량껏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좋을까.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세금을 낸 나나 받은 삭개오 아저씨나 하하호호한 이유를 말로는 설명 못 하겠지만, 어쨌든 기분 나쁜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한국에 발을 들여놓을 때 이런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인지 무리한 일정인데도 큰 사고 없이 지내고, 좋은 분들도 많이 많이 만난 모양이다.
    너는 너의 역할을, 나는 나의 역할을 다 할 때 우리는 하하호호하게 되는 가보다.
    온수매트야 너 새벽에 혼자 알아서 꺼졌더라. 너는 너의 역할을 잘 못 했지만, 그래도 내 재량껏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봐줄게.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번주가 중국 블랙프라이데이인 광군제 기간이라는 것이야. 그 코타츤가 뭔가 아주 좋다더라. 긴장을 놓아선 안 되는 거 알지? 나 밀당 고수잖아. 후훗
#단상 #너와나의역할 #기분좋은세금내기 #그술누가다먹었을까? #내뱃속에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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