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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22. 2018

우리가 가끔 늦잠을 자야하는 이유

#단상 #늦잠

<늦잠을 자는 나에 대한 단상>

    나는 가끔 푹~ 잔다.
    그러니까 세상 정신줄을 놓고 푹 자 버린다.
    어느 정도로 푹 자느냐면 비글들이 거실로 나와서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그냥 잔다.
    이런 상태는 쉽게 오지 않는데 술을 굉장히 적당히 먹어야 한다. '굉장히 적당히'란 말이 모호하게 들리지만, 술자리에서 내가 대충 감으로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순간이 오는 때라 말로 적절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대신 몇 가지 필요조건은 반드시 갖춰야 한다.
    1. 좋은 사람들과 마실 것.
    2. 기분 좋게 마실 것.
    3. 술을 강권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느낌이 왔을 때 콜라로 음료를 전환할 수 있는 격조 있는 자리일 것.
    4. 자리를 마치고 나올 때 '아. 한 잔만 더 하고 싶다'라는 아쉬움이 남을 것.
    어제 럭셔리 훠궈집 회동은 진짜 진짜 이런 필요조건이 충분히 차고 넘치게 채워질 정도로 기분 좋고, 아쉽고, 자유로운 자리였다.
    늦잠을 잔 날은 그날 컨디션이 매우 상승하는데 보통 기사가 술술 잘 쓰인다거나 애를 잘 본다거나 밀린 집안일을 원샷원킬로 해낸다거나 그런 초능력이 발현된다.
    평소에 몸을 거의 혹사하는 편이어서 가끔 이런 '일탈'을 실행해야 하지만, 베이징에 온 뒤로 늦잠을 잔 날을 손에 꼽는다. 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고, 휴가인 날도 보통은 애들과 시간을 보내야기 때문에 '이보게 젊은이 차라리 일하는 게 낫소'라는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나의 독박 육아의 날.
    운 좋게 늦잠 '힐 스킬'을 받고 깔끔하게 시작했다. 육아의 날에는 체력 관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만큼 굿 스타트는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매일 쓰는 단상까지 빼먹을 수는 없으니 일어나자마자 근래 들어 가장 멀쩡한 정신으로 한편 끄적여 본다.
    늦잠 자는 날은 내 생활에서 '휴게소'와 같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고 가끔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고 옷 매음 새를 가다듬고, 주린 배도 좀 채우고, 졸음을 쫓기도 해야 한다.
    내 마음 같아서야 쭉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상사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지난번 한국행에서 전체 일정 동안 1200㎞를 운전했다. 졸음운전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됐는데 시속 100㎞가 넘는 속도에서도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는 그 간담 서늘한 기분이란 눈앞에서 애들과 록수 얼굴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아찔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끔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챙겨야지 내 마음대로 내달리다가는 그냥 이세상과 작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싸구려 커피라도 좋으니 소떡소떡을 가운데 놓아두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나에 집중하지 말고, 가족, 지인, 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자. 나와 함께 있어 너무 행복한 얼굴인지, 근심 걱정하는 얼굴인지, 아니면 이제 막 근심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는지 말이다.
    이렇게 한번 시원스레 쉬고 나면 더 멀리, 더 오래 달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얼마 전 '어른은 어떻게 돼' 저자인 박철현 작가님이 타임라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방향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방향성 못지않게 추진력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아니다 싶으면 '접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 맥락의 이야기였다.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데 길치인 나는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길을 수정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멈춤'의 과정이 필요하다. 멈춰 서야만 돌아설 수 있고, 접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미친 듯이 달리다가 늦잠을 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멈춰 선 김에 비글들 얼굴도 돌아보고, 록수의 얼굴도 보기는 좀 무섭지만 그윽하게 쳐다봐야겠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술 먹고 일행 차 트렁크에 두고 내린 내 노트북 백팩부터 찾아와야겠다. 응. 그렇다. 이거 핸드폰으로 쓰는 중이다. 군인이 전쟁 갔다 오면서 잠시 총 두고 왔네. 하하하하하하하. 어제 집에 들어와서 씻다가 알았다는 것이 더 충격이다.
#단상 #늦잠 #쉼표 #휴식 #휴게소 #소떡소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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