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무지개물고기의 사랑
겨울이 다가왔다.
찬바람이 휭휭 불어 대는 12월 초, 회사 안에도 찬바람이 불어 닥쳤다.
갑작스럽게 자금사정이 안 좋아져 더 이상 중국사업에 자금을 투입하기가 어려워지고 콘텐츠제작을 하던 중국 파견인력이 복귀했다.
중국사업뿐만이 아닌, 국내사업을 위한 운영비조달도 힘들어진 상황이 되어 사업을 축소하고 자진 퇴사 신청을 받고 있다.
신청자가 없을 경우 강제로 내보내고 최소한의 인력만 남겨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호는 한 사람이라도 줄여야 한다니, 자연스럽게 퇴사신청을 했다.
황 팀장이 민호를 부른다.
“장 대리! 넌 남아주면 좋겠는데, 최소한의 인력 중 한 명이야.”
“죄송해요, 팀장님. 전 지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퇴사하려던 참이었어요. 회사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
“팀장님과 김 실장님께 도움 못 드리고 이런 상황에 나가게 되는 게 죄송하지만, 오히려 잘 된 거 같아요.”
“왜지?”
“음,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요.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거 같아서요.”
민호는 복잡한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말로 답한다.
“난 장 대리를 평생지기로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순 없겠니?”
“……”
회색 봉고차량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물류창고로 이동 중이다.
물류창고에 쌓여있는 국내서적을 팔아 최소한의 자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동화책을 포장하러 물류창고로 지원 작업을 가는 차량 안에는 흥수가 민호와 함께 앞자리에 앉아 있고 뒷자리에는 민용과 수지, 필화 대리가 흥수의 무리인 것처럼 같은 날로 지원 신청하여 함께 가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나 참 더러워서, 내가 이런 일이나 해야 하다니?”
“안 쫓겨나려면 해야지 뭐, 당장 어디 갈 곳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까요. 중국 가서 고생만 하다 왔더니 회사 나가라는 식이니.”
어느새, 메마른 논의 한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회색철제건물 앞에 차량이 멈춰 선다.
높고 커다란 철제문을 열고 창고에 들어서니 묵은 책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몸으로 스며든다.
층고가 높아 목소리가 입김과 함께 허공을 가른다.
겨울인 데다 이 곳은 사람 없는 창고라 그런지 유난히 더 춥고 손가락이 벌써 시리다.
쌓아둔 동화책 사이에서 필요한 책을 골라 박스에 채워 컨테이너벨트에 그 박스를 올리고 이동시켜 트럭에 싣는 일을 해야 한다.
오전엔 책을 고르고, 오후에 한꺼번에 박스를 나르기로 했다.
출판된 다양한 책 박스들이 높게 쌓여 있다.
켜켜이 쌓인 박스사이에서 일일이 책을 찾아야 하는데 한 번에 여러 박스를 옮기기엔 위험하여 하나하나 옮기며 찾는데 여간 불편하고 힘든 게 아니다.
직원들이 불만이다.
일하는 건지, 잡담을 하는 건지 삼삼오오 모여 툴툴 데며 책을 분류하고 있다.
“정말, 이게 뭐 하는 건지.”
“그러게요, 흥 대리님. 내가 이런 일이나 하다니 힘들어 죽겠어요.”
필화 대리가 약한 척 콧소리를 내며 흥수 옆에서 책을 찾고 있다.
“완전 노가다구만,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줄 아나, 아 씨팔.”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야지, 어쩌겠냐 민용아!”
“그래요. 우리 온 김에 놀다가요. 호호호” 필화 대리가 거든다.
“그러죠, 젠장!”
불만이 더욱 거칠게 터져 나온다.
민호는 조용하다. 떠나려는 마음에 아쉬움 때문일까?
몸담았던 곳에의 정, 미련, 애사심인지, 아니면 측은지심, 배려심이 타고난 마음 착한 아이라 그러한 것인지, 몸도 마음도 주변사람들과는 너무 달라져 있기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
조용히 책 분류작업만 할 뿐이다.
색깔이 다른 민호가 이젠 불청객, 아웃사이더다.
“그런데, 저기 장 대리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해요? 이 상황에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잘리기 싫은가 보지 뭐, 원래 이상해요. 독고다이야! 그냥 냅둬요.”
“……”
흥수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지켜만 본다.
흥수가 그렇게 바라던 데로 지금 민호에겐 자신밖에 없게 됐지만, 이런 상황에 저렇게 일만 하는 민호가 이해가 안 된다.
이젠, 흥수의 미련이 민호를 잡고 있는 것일 뿐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민호는 직원들의 말소리가 들리지만, 조용히 묵묵하게 책을 고르는 일에만 집중하려 애쓴다.
함께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된 게 너무 마음이 안 좋은 자신이 회사험담을 하는 남들과 너무 다르다고 느낀다.
오전에 황 팀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이젠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책을 고르던 중, 민호가 좋아하는 동화책이 눈에 띈다.
“무지개 물고기의 사랑” 한켠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책을 들어 흰 장갑으로 먼지를 닦으니, 책표지의 빨강물고기가 자신을 쳐다본다.
‘너무 걱정 마~~, 다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야.’
오전 시간이 지루한듯했지만, 금세 오후가 됐다.
오전에 일을 못해서 작업분량이 많이 남아있다.
오늘분량이 정해져 있기에 할당량을 채우기 전까지 퇴근을 못한다.
안 하던 일을 해서인지 몸이 벌써 뻐근하지만, 불만 가득한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열을 내며 박스에 달려들었다.
민용이 높게 쌓인 박스를 내리고자 사다리로 올라가 박스를 무리해서 들다가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허리를 삐끗했고 통증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흥수는 구급차를 불렀고 민용을 부축해서 함께 물류창고를 떠났다.
순식간에 썰렁해진 창고 안에는 여전히 박스를 기다리는 컨테이너 벨트만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윙, 윙~”
민호는 자신이 외면했거늘, 그런데 자꾸 파고드는 이 쓸쓸한 감정이 맘에 들지 않는다.
춥다.
겨울이다.
‘빨리 이 겨울이 끝났으면….’
누구는 이 싸늘한 겨울이 끝나길 바라고, 누구는 무사히 지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