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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만추(晩秋)

1부. 무지개물고기의 사랑

by 앤드장

황정선 팀장은 남자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

일만 하며 바쁘게 살기도 했지만, 자의든 타의든 남자를 많이 만나보지 않아선지 이성에 대해 관심이 안 갔다.

김은희 실장으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 돌이켜보니 이성보다는 일에 빠진 여성들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과 비슷해서 관심이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이 동성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은희라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질문해 보아도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자신은 남자, 여자 이런 게 아닌 김은희라는 그 사람이 좋아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미 콩깍지가 씌어 결론은 나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그날 밤, 황 팀장은 너무 황홀했고 앞으로는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자꾸 미안하다는 김 실장의 말이 거북하고 듣기 싫었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감추기 힘들어진 황 팀장은 김 실장에게 멀지 않은 화담숲으로 단풍구경을 가자고 했다.


깊어진 가을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걷고 있다.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그야말로 만추(晩秋)다. 산전체가 꽃처럼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다.

그림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처럼, 울긋불긋한 단풍빛깔이 너무 아름답다.

김 실장은 얼마 만에 느끼는 기분인지 따뜻한 가을햇살이 몸을 감싸자, 숲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 이런 곳에 이제야 오게 됐을까?’ 그간 너무 정신없이 살아온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들생각이 나고, 그놈 생각도 난다.

그 남자와는 유흥을 즐기기만 바빴지, 이런 곳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함께하는 동안 불안하고 초조하며 시기와 질투로 불행했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과 함께 지난날들이 흩날리며 사라진다.

언제부턴가 늘 곁에 있는 황 팀장의 나눔과 배려심은 자신에게 여유와 만족을 주고 그녀의 따뜻한 마음 씀은 안정감과 행복감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든든하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마음이 아름다운 이 여성, 이젠 너무 친근하다.

너무 익숙해져 그녀가 없는 일상이 상상이 안 된다.

사장 집에서 파티가 있었던 그날 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언젠가는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황홀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라 애써 떨쳐버린 게 여러 번이다.

‘사과가 아닌 고백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데 좋아하는 게 아닐까?’ 김 실장은 정리가 안 되어 혼란스럽다.


“황 팀장, 너무 좋다. 이런 곳에 데려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호호호. 단풍이 절정이긴 한 거 같아요, 너무 아름답네요.”

“처음이야. 이런 행복한 기분.” 김은희 실장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황 팀장은 김 실장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독백처럼 말이 흘러나온다.

“저도 행복해요, 실장님.”

김 실장이 황 팀장을 쳐다보자, 황 팀장은 잠시 동공이 흔들리다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쳐다본다.

‘사랑해요.’라고 마음이 말하자, ‘사랑해요.’라고 메아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하다.

서로 피하지 않고 점점 다가선다. 그리곤 서로 껴안고 입술을 포갠다.

깊어진 가을을 두 여인이 통하고 있다.

“사랑해~.”

“사랑해요!”




민호는 공원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단풍들과 수북이 쌓이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다.

손을 잡고 지나가는 연인들을 보며, 언제쯤 자신도 연인을 만날지 부러울 따름이다.

‘함께 기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혼자 있음에 누군가가 필요한 걸까? 사람 냄새나는 누군가가 그리웠던 게 아닐까?’

흥수와 필화 대리를 떠올려본다.

친구도 연인도 무엇도 아닌, 이상해져 버린 관계로 더 이상 편치 않은 사람들이 됐다.

한때 갑작스러운 무관심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흥미를 잃고 함께 시들해졌다.

이젠 정말 자신과 맞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사장님처럼 그런 연인을 만나 인연을 쌓아가고 싶은데, 때가 되면 만나지려나?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붉게 물든 단풍잎이 대비를 이루며 선명하고 단호하게 민호의 마음속으로 절실히 파고든다.


흥수는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져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마른 나뭇잎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나뭇잎의 끝자락이 조금 붉어져 있다.

이 가을 흥수는 가슴이 시리다.

그가 돌아섰음이 선명하게 느껴지기에, 그를 정말 놔야 할 거 같다.

너무 외롭다.

'옆에 민용이라도 있었으면, 이 마음 달랠 수 있었을까?'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떨어진 축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납작이 엎어져 흐느낀다.

물에 빠진 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오늘도 술을 마셔야 한다.

그래야 잠을 잘 수가 있다.




이른 아침, 황 팀장과 김 실장이 함께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오고 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민호가 출근길에 인사를 건넨다.

“그래, 장 대리도 안녕. 즐거운 아침이야!”

둘이 다정해 보인다.

“함께 출근하시네요?”

“응.”

둘은 항상 같이 있는 것 같다. 일할 때도 쉴 때도.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정말 잘 어울려, 보기 좋아.’


이젠, 둘은 연인사이다.

김 실장의 아들을 키우며 둘은 함께 산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잘 맞는, 배려하는, 솔직한 그녀들이다.

동성, 이성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님을, 타인의 시선은 중요한 게 아님을, 누가 뭐래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사랑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닌 서로 배려하고 위하고 감쌀 때, 진실한 사랑이 싹이 나고 결실이 되는, 인간 삶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름답고 행복한 그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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