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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오,보라!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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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이시 Oct 01. 2022

퇴원 면담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수술을 하고 온 아가씨는 마취가 풀리면서 너무 아파했다. 간간히 비속어가 섞인 말들을 뱉으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을 보니, 아픔은 안타까웠지만, 저토록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솔직할 수 있다는 것에 저 친구의 세대에게 오보라 씨는 이상한 열등감을 느꼈다.

 
 ‘내가 저토록 내 감정에 솔직해 본적이 언제였지?’


오보라 씨는 기억이 있을 때부터 늘 동생을 염두해가며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해야 했다. 딸기 도넛을 먹고 싶었어도 초코 도넛으로 나쁘지 않아라고 했듯이 말이다.


‘어제 닥터 김이 말한 것처럼, 생각보다 훨씬 내가 돈을 좋아하고, 착한 척했던 걸지도 몰라. '

 
오보라 씨의 생각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내 앞에 램프의 지니가 나타난다면 난 어떤 세 가지 소원을 말할까?’


아마 지니가

“오보라 씨, 3가지 소원을 말해보세요.”


라고 하면 오보라 씨는 보라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첫째,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건강하고, 둘째 동생 건강하고 잘되고, 셋째 정도 돼서 내 월급 인상 정도 말하지 않았을까? 근데 만약 지니가 오보라 씨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당신의 원하는 바를 말해보세요라고 했다면?’


오보라 씨는 최대한 자신에게 솔직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자 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 내가 오보라 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소원을 말한다면, 로또 맞는 것, 강남에 집사는 것, 파리에 가서 베이킹을 베우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 같아.’


오보라 씨는 베이킹을 본격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이 자신에게 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보라 씨는 오전 내내 마음이 심란했다. 오보라 씨의 감이 맞다면, 아마 닥터 김은 오늘 정도 퇴원 후 통원치료를 제시할 것 같았고 오보라 씨가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전 11시쯤 지나서, 신경과에서 오보라 씨를 부르는 호출이 왔다.


“오보라님, 신경과 내려가서 진료 보실게요.”


오보라 씨는 입원할 때까지만 해도 실체 없는 바람과 싸우는 것 같았는데, 이제 적어도 이 증상이 언제 나타나는지에서는 이성적으로 정리가 돼가는 것 같아서 닥터 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보라 씨는 빨간 버튼을 누르고 환자석에 앉았다.


“오 보라님, 오늘 오른쪽은 좀 어떠세요?”

“처음 온 날 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

“제가 수액과 약으로 증상을 막아보고 있습니다만, 일상으로 돌아가셔서 자극이 또 발생하시면 언제든 다시 마비가 올 수 있습니다. "


오보라 씨도 마음속으로 오늘쯤 퇴원을 하겠다 예상했듯이 의사 선생님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듯했다.


“오 보라님, 퇴원하시고 당분간 일주일에 한 번 저를 만날게요. 날씨가 고온 다습할 때는 증상이 더 쉽게 나타날 거기 때문에 에어컨으로 온도, 습도 잘 조절하셔야 하고요. 멍 때리기를 잘하셔야 돼요. 뇌가 쉬어야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어요?”

“네. 이해는 가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음, 오보라 씨 이렇게 합시다. 제가 강박 약을 좀 쓸게요. 본인도 본인의 신경을 건들지 않기 위해 애쓰셔야 해요. 멍 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퇴근하고 무조건 1시간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러닝머신 하세요. 그리고 그 뭐든 잘해야 된다는 압박 빼고 그냥 하는 거 어때요? 제가 지금 오보라 씨 진료를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냥 하는 거예요. “

“음, 노력해 보겠습니다. “

“오보라 씨, 자주 쓰시는 단어 중에 노력이 있는 건 아세요? 뭘 그렇게 노력해요. 지금까지 오보라 씨가 달려온 길에 가장 큰 오류가 뭔지 아세요? 노력하면 다 된다는 착각을 버리지 않고 있는 거예요. 오보라 씨는 오보라 씨 그대로를 받아들이시야죠, 왜 그렇게 다른 사람에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 말에 오보라 씨는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엄마, 아빠, 동생, 직장 동료들, 남편, 딸, 시부모님…… 오보라 씨는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오보라 씨가 되려고 애써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내면서도 계속 뭔가 잘 못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신과에도 따로 가야 할까요?”

“오라님, 제가 보기에 본인은 신경계 빼고 다 정상이에요. 그 시간에 운동이나 하세요. 정신과 가시면 어릴 적 트라우마, 장녀 컴플렉스로 허우적거리면서 신경이 더 자극될 것 같아요. "


오보라 씨는 그 말이 조금은 기분이 나쁘면서도 너무나 인정이 되었다. 오보라 씨가 정신과 상담을 받으려면, 어머니 아버지가 오보라 씨의 이름을 오보라로 짓던 날로 거슬러올라가 거기서부터 시작해 돼야 될 테니 말이다.  


“어릴 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곱씹지 마시고 오늘만 보시고, 이번 주 만 보시고, 이번 달만 생각하세요.”

 
 닥터 김은 며칠 사이에 그런 오보라 씨는 다 간파한 것 같았다.


“아, 선생님 제 친구 중에 정신과 다니는 친구 있는데 계속 편두통도 심한 친구가 있는데, 선생님을 소개해도 될까요?”

“아니, 그놈의 인류애는 왜 이렇게 넘치는 거예요? 지금 오보라님, 친구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본인 조금만 무리하면 발작 오는 몸을 가지고 지금 친구 걱정하게 생겼어요? "

“아. 그런가요?”

“친구도 신경과 환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정신과 쪽이면 정신과 다니면 몸도 나아야 되거든요. 근데 정신과 다녀도 여전히 편두통이 심하다면, 신경과에 와야 하는 편두통 환자인데, 머리가 계속 아프니까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닥터 김은 무심한 듯했지만, 친구에 대한 코멘트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오라님, 노력해보시는 건 좋은데 노력해서 안되면 좀 포기하는 건 어때요? 지금 오라님이 노력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시지만, 예를 들어 지금 오보라님이 고3 3월인데 그때부터 노력하면 서울대 수석 할 수 있어요? 저라면 못할 것 같아요. 능력치의 한계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 자체가 지금 최선을 다하는 건 내가 이거를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뭘 반드시 이뤄내려고 노력하면 사람이 지치거든요. 노력은 하되, 안되면 안 되는 거지 뭐 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어때요? 고등학교 때 어느 대학 가려고 딱 정하고 공부했어요? 그냥 열심히 공부하다가 수능 결과에 맞는 대학에 가게 되었잖아요. 인생은 그런 거예요. 잘될 거다 못될 거다 이런 생각하지 빼고 그냥 해봐요. 어떤 걸 하면서 오보라 씨는 결과물이 도출이 될지 안 될지 계속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런 거예요. 다이어트하는 사람이 운동하면서 지금 1kg가 빠지고 있으려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 운동이 재미있겠어요? 아니 버틸 수나 있겠어요? 그러니까 증상 자체가 백신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보라님 직장, 가정 다 잘하려고 잔뜩 긴장하고 있으니까 근육도 뭉치고 해서 호흡고 잘 안돼요. 이게 다 연장선에서 만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럼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거지요?”

“단어를 바꿔봐요.”

“신체?”

“본인은 신경계 빼고 다 정상이에요.”


이 말은 오보라 씨의 마음을 클리어하게 해 주었다.


“지금 오보라님 뇌신경 자체 이상이 와서 치료받고 있는 거고요. 강박과 불안이 심해서 그게 자꾸 자극된 거고요.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어떤 것을 못하겠으면 깔끔하게 포기해요. 아 그리고 착한 여자 콤플렉스 좀 제발 덜 어네요. 본인 그렇게 착하지도 않아.”

“그게 노력하는데 잘 안되네요.”

“오 보라님 뭘 그렇게 노력해요. 포기하라는 건 적당히 하라는 게 아니라 아예 거기 스위치를 끄라는 거예요. 전 인류를 위해 봉사할 거 아니잖아요. 돈 벌고 싶어 하잖아. 주변 살피는 거 그만하고, 본인이나 돌아봐요. “

“말씀 감사해요. 좀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 그릇과 분수를 고민하지 마세요. 결과는 노바디 노즈잖아요. 하루하루 하다 보면 인정받고 연봉 높이고 그러다 오보라 씨의 파이널 레벨이 뭐가 될지 누가 알아요. 그리고 만약 지금 회사에서 입지가 불안정하다고 칩시다. 잘려요? 안 잘리잖아. 좀만 캄 다운해요.”


 닥터 김은 나름 오보라 씨를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다.


“여하튼, 저는 오보라 씨가 정신과 환자는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퇴원하시면 햇볕 노출 절대 피하고 적정온도와 습도 잘 조절해야 돼요. 아, 그리고 커피는 좀 줄이세요. 커피가 증상에 좋지는 않아요. 저림이 심해지거나 발작 있으면 바로 비상약 복용하고요. 이렇게 일주일 지내보고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퇴원은 간단했다. 할부는 3개월로 했고, 보험사에 낼 서류는 다음 방문에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간단히 며칠 있었던 곳과 이별할 수 있다는 것,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오보라 씨는 닥터 김의 말처럼 오늘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가씨, 오늘 가는가?”


간병인님은 그새 오보라 씨와 정이 들었는지 아쉬워했다.


“네, 많이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오보라 씨가 준비한 다음 말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였는데,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오보라 씨는 병원에서는 다시 뵙자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병원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오보라 씨를 가장 먼저 맞았다.


오른쪽 뒤통수가 조금씩 당겨지는 듯했지만, 이제 오보라 씨는 이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닥터 김의 촌철살인 같은 진료 덕분인지 닥터 김이 처방해준 신경 발작 비상약 덕분인지 오보라 씨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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