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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18. 2023

17화. 트라우마

소설 같은 이야기



트라우마는 심각한 위험에 노출이 되어 심리적 외상을 겪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자주 비난받거나 맞았던 경험이 있는 경우에도 생길 수 있는 증상이다. 심각한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불화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술이나 도박에 중독되어 가족을 폭행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그러니 부모의 말과 행동을 모두 따라서 할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행동 중 죽어도 절대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도, 내가 부모가 되어 그대로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강도가 약하더라도 내가 가지게 된 트라우마를 그대로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마치 유전인 것처럼.   

  

실제 신체적인 부분이 유전되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성격적인 부분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비슷한 뇌 구조로 구성되어 있을 테니까. 인간의 몸도 마음도 모두 뇌가 지배하기에 그렇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궁금할 것이다. 누워서 침 뱉기가 될 것 같아서 망설이며 고민하는 중이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말이다.     


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다정할 때는 한 없이 다정하다가도,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다행히도 술중독이나 상습 폭행자는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여러 번 충격적인 사건이 있기에 불혹의 나이에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버지와 오래 있으면 불안하다.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고요한 날씨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아버지와 오래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날벼락을 맞을 때가 있다. 가부장의 표본인 50년대에 태어난 그분은 아들이 조금이라도 기어오르는 느낌을 받으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마치 사자 무리에서 아들이 커서 우두머리 아빠 사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묵사발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을 때 흥분하며 막말을 한다. 혀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이따위로 할 거면, 때려치워! 나가 죽던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첫 시험 성적표를 집에 들고 온 날 들었던 말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머릿속에서는 ‘죽음’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상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아니 무서웠다. 죽는 게 두려웠다. 눈물이 흘렀다. 큰 상처와 함께.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그중 두 사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첫 번째는 밥 먹다가 아버지한테 밟힌 기억, 두 번째는 추운 겨울에 속옷만 입은 채로 집에서 쫓겨난 기억이다. 두 사건 모두 나는 아버지한테 잘못한 게 없었다. 단지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을 뿐. 아버지한테는 그게 문제였다. 아들이 엄마한테 편하게 대하는 걸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와 아직도 대화도 많이 하고, 가깝게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그만큼 편하고 친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언제나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버릇이 없거나 아버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혼나야만 했으니까.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건,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내 삶이 궁금하다.      


자꾸만 캐물으니까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거나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면 화가 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궁합이 안 맞는다. 부모와 자식 간에 궁합이 안 맞을 수 있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걸까. 어떤 집은 그래서 일부러 기숙사 있는 학교로 자식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아니면 집에서 피 터지게 원수처럼 싸우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니까.     


나는 혈기는 왕성한 신성 사자지만, 무리의 우두머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사자가 아니라 나는 인간이니까. 자식으로서 도리를 하지 않는 건 어긋난 일이니까.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상습이 아니라 아주 가끔 돌발적으로 터지는 일이니까 고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고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첫 번째 사건은 주말 이른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차로 자연농원에 데려다주신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갈 수 있어?”     


자연농원은 용인시에 있는 놀이동산으로 지금의 에버랜드다. 친구는 나를 섭외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었다. 서울랜드나 롯데월드는 가봤어도 자연농원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거긴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었으니까. 부모님은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었기에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더 가고 싶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일단 다른 집에 신세를 지는 것에 대한 반대. 갑작스러운 계획이라서 반대. 입 밖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아마도 예상외의 지출에 대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이고, 아버지는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 월급이 적었기에. 아버지 월급이 100만 원이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자연농원에 가려면 3만 원 가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고 있는 가장으로서 충분히 지금은 이해된다. 예산이 있는데 구멍이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는 무서우니 어머니한테 졸라댔다. 한 번만 보내 달라고. 그러면 공부 더 열심히 할 거라고. 이런 기회는 없을 거라고. 작전이 통하지 않자 비난을 시작했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어서 그동안 자연농원에 못 갔냐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두툼한 발이 내 머리를 향하는 걸 두 눈으로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게 되었으니.      


몇 차례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수차례 발로 등을 가격당했다.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었지만, 강한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애가 죽으면 안 되니까 힘 조절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화는 참지 못한 것이다. 그날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한테 가장 크게 혼나고 맞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다급히 아버지를 말리셨다.

     

“그러다 애 죽어요. 그만 해요.”     


나는 엉엉 울었다. 아파서 울고, 억울해서 울었다. 자연농원에 못 가는 것도 서글픈데 맞아야만 했으니까. 그것도 인권이 완전히 무시된 채로 밟혀야 했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가정 폭력으로 신고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상습이어야 범죄로 인정이 될 테지만, 그래도 옆집에서 신고해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는 가정에서 폭력은 훈육이라는 명목이 인정되던 시절이라서 누가 신고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한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어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자연농원에 같이 갈 수 있다고 말하라고 했다. 늦었을지 모르니 빨리 전화하라고 했다. 어느 때 보다 어머니의 행동은 쏜살같이 재빨랐다. 진짜 불쌍해서 그런 건지, 아버지와 잠시 분리하려고 그런 건지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다행히 몇 분 안 남기고 친구 아버지 차를 타고 자연농원에 갈 수 있었다. 극적인 합류였다. 그리고 새로운 놀이기구는 충분히 나를 흥분시킬 만했다.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놀라운 사실이 있다. 가끔 아버지한테 서운할 때 ‘자연농원 폭행 사건’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그러면 본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항상 그런다. 내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니까 가부장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 가끔 그렇게 쉽게 사과해주시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트라우마는 반복되지만. 

    

두 번째 집에서 쫓겨난 때도 내가 어머니한테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른채 아버지는 갑자기 화를 내며 나를 집 밖으로 던져버렸다. 추운 겨울이지만 연탄불이 따뜻해서 방에서 내복만 입고 있었기에 밖에서 맨발로 오돌오돌 떨 수밖에 없었다. 던져졌으니 신발도 제대로 신고 나오지 못했다. 혹시나 학교 친구들이라도 마주칠까 봐 벽에 몸을 가까이 대고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     


다행히 연탄보일러가 집 밖에 있어서 뚜껑을 열고 연탄불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다툼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애를 데려오라고 하고, 아버지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 한다며 나가지 말라고 서로 무한궤도를 그리며 높은 언성을 주고받았다.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내 모습이 초라했다. 12살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기에 나름 학교에서는 큰 형이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씩씩거리며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소리쳤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사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 나와 있었다. 어머니와 대화하는 도중에 아버지의 외력에 의해 밖으로 던져진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몰라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이것 봐. 아직 반성이 없어! 그냥 여기서 얼어 죽어!”     


아버지는 나를 밖에 그대로 세워둔 채 다시 문을 쾅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답답했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는데, 어찌해야 할꼬. 다행히 아버지는 집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다. 그리곤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요. 알려주시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정말이야? 정말 모르는 게 맞는 거야?”     


아버지는 여러 번 되물으시더니 내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자. 이유를 알려 주셨다.   

  

“엄마한테 말하는 태도부터 고쳐! 어린 놈의 시키가 건방지게 니가 엄마 친구야?”     


그랬다. 단지 나의 말하는 태도가 건방져서 나는 그날 그렇게 혼난 거였다. 그런데 진짜 몰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원래 어머니와는 편한 말로 대화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 귀에는 불편한 대화였나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추워 진짜 얼어 죽기는 싫었으니까.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뭘 안 그럴 건데?”

“엄마한테 반말 안 할게요.”

“그래 그래야지! 어서 들어가!”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는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아버지는 28세에 결혼하셨고, 나는 33세에 결혼했으니 차이가 날 수밖에. 진짜 딱 5년 차이가 난다. 첫째가 7살이니까. 그리고 나는 정말 아버지처럼 내 자식들에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 나에게도 똑같은 모습이 보이기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를 닮기가 싫었는데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밖에서는 남들에게 화를 한 번 낸 적이 없다. 정말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화가 난다. 거짓말처럼 나보다 만만한 아내에게 아이들이 버릇없게 굴 때 그렇게 화가 난다. 미운 4살이 된 첫째가 하루는 아내한테 못되게 굴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소리를 ‘빽!’ 지르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엉덩이랑 발바닥을 때렸다. 통증이 느껴질 만큼.

      

첫째는 아주 발버둥을 치며 난리를 쳤다. 게다가 항상 다정하고 천사 같은 아빠가 자기를 때리니까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더 난리 부르스였다. 막말로 지랄발광이었다. 그러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아주 슬픈 목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약 30년 전 내가 아버지한테 맞고 혼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똑같이 아이에게 트라우마와 상처를 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아이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때려서 미안하다고 계속 말했다. 그렇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더니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눈물을 훔치며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아빠에 대한 원망의 눈빛은 아니었다. 비록 실수한 건 맞지만, 바로 사과하는 아빠의 모습에 다행히도 상처가 나다가 만 것 같았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상황이 종료된 후에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죽어도 안 하겠다는 행동을 내가 했으니까. 자책했다.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와 똑같은 트라우마를 갖지 않도록.      


첫째는 그 후로 혼낸 적이 없다. 그런데 둘째가 4살이 되자 또 문제가 생겼다. 어떻게 하다 보니 누나를 발로 쳐서 입술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나는 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둘째를 번쩍 들어서 방을 데리고 가서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짝. 짝. 짝.’     


둘째도 충격에 휩싸였다. 단 한 번도 자기를 혼낸 적 없던 아빠가 야수처럼 크게 소리치며 자기를 때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첫째 입술에 피가 마르지 않으니 나는 내 행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도 계속 발바닥을 맞으니까 자지러지며 울기 시작했다. 아파서 우는지 배신감에 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첫째가 급히 방으로 들어와서 나를 말렸다. 자기는 괜찮으니 동생 그만 혼내고 때리지 말라고. 첫째가 자기 입으로 괜찮다니까 나는 그제야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야수가 된 나를 발견하곤 괴로움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지 했는데 또 행동이 반복되었으니까.      


둘째에게도 바로 안아주며 사과했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흘렀다. 혼내고 때려서 미안했다. 자괴감이 들어서 슬펐다. 여러 이유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첫째도 둘째도 가끔 사건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때 아빠가 내 발바닥 때렸지?!”     


고요한 호수에 갑자기 돌을 던진다. 어쩌면 내가 먼저 아이들의 고요한 호수에 돈을 던져서 그런 걸지도. 딱 한 번뿐이었는데도, 파장을 일으키는 돌이 날아온 걸 잊지 않았나 보다. 누가 돈을 의도적으로 던지지 않는 이상 잔잔한 호수가 출렁일 수 없으니.           




3년 동안 코로나로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우리 아이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안 그래도 거리가 멀어서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1년 넘게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드디어 코로나가 풀렸고, 아쉬움이 있어서 여름 휴가 때 부모님 댁에 며칠 머물기로 했다.      


첫날은 너무 행복했다. 오랜만에 만난 3대가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 나누고, 식사도 맛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튿날이었다. 점심 식사하려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 정신없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내 트라우마가 발동했다. 아무리 정신없게 한다고 해도 1년에 몇 번이나 볼 수도 없는 토끼 같은 손주들에게 소리를 ‘빼액’ 지르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나도 모르게 아버지한테 소리쳤다.   

  

“아니 애들이 오면 얼마나 자주 온다고 혼내고 그러세요!”     


그게 문제였다.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도전하는 아들 사자가 등장했으니. 더 크게 포효할 수밖에.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버지가 흥분한 모습을 보는 게. 아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 모습. 인자한 시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남겨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니까.     


하지만 이미 성체가 되어 새로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수사자는 가만히 내 새끼들이 물려 죽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직접 물어버리면, 큰일이 날 테니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얼떨결에 원인을 제공한 새끼들에게 불똥이 튄다. 새끼들을 나무랄 수밖에. 하지만 우렁차게 소리친다. 다 들으라고. 왜 내 새끼들한테 소리치냐고 항의하듯이.      


말을 안 했는데도, 감정은 다 전달되나 보다. 아버지는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그리고 도전장을 내던진 수사자의 목덜미를 강하게 문다. 그리고 밖으로 끌고 나간다. 마치 세상을 끝낼 것처럼.      


반전이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많이 늙은 우두머리 사자는 갑자기 나를 회유한다. 오히려 얌전한 모습에 혈기 왕성한 아들 사자는 더 따져 묻는다. 그러자 잠시 이빨을 숨겼던 우두머리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둘 중에 누가 하나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다. 트라우마도 이미 발동했고, 숨어있던 상처는 더 깊어가지만 멈춰야만 한다. 젊은 수사자는 참기로 한다. 이러다가 정말 누가 죽게 될지 모르니까. 자존심 부리다간 큰일이 날 테니까.     


급하게 꼬리를 내리고 사과하니 우두머리 사자는 진정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상황이 종료된 것이라 믿는 우두머리 사자는 혼자서 술과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시원하게 속내를 다 말하지 못한 수사자와 가족은 혼을 쏙 빼놓은 듯 멍한 상태로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음식은 생각도 안 난다.      


잠시 정신을 차린 후에 급히 짐을 챙겨서 가겠다고 하고 나왔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들 사자네 가족은 다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났다. 몸도 떠났고, 마음도 떠났다. 진지하게 고민한다. 진짜 떠나 더는 교류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마음이 괴로우니 속이 시끄럽다. 화장실을 들락날락 배탈이 나버렸다. 하루 종일 누워있어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해 여름은 반가운 만남도 잠시 잘못된 만남임을 깨닫고 반성한다.      


비록 도리를 다한다고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세상 누구라도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도 놀랄 수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겠지만, 흉터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부모 자식 사이에 연을 끊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니까.           


     



그 후로 1년이 지나 명절이 되었다. 가족이니 다시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도 나름 시간이 흘렀다고 기억이 흐려진 느낌이다. 마음도 그때처럼 괴롭지만은 않다. 부모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1년 만에 만나는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반긴다. 그리고 조금 어색함이 사라지자 둘째가 그동안 배운 태권도 발차기를 멋지게 선보인다. 어른들은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그런데 갑자기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선사한 둘째가 돌발 멘트를 날린다.      


“할아버지가 우리도 혼내고 아빠도 혼냈지!”     


순간 모두 얼음이 됐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허허허 웃으며 손주에게 말한다.     


“이 녀석, 아직도 그걸 기억하네. 할아버지가 혼내서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할아버지가 우리도 혼내고 아빠도 혼냈지!”     


눈치 없는 둘째는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머쓱한지 다시 사과하며 손주를 꼭 안아준다. 둘째의 재간에 자연스럽게 할아버지한테 사과를 받았다. 가장 많이 혼난 나한테 직접 사과를 한 건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인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비는 모습에 나도 마음이 조금 풀린다. 우리 애들에게 화낸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나도 그랬던 거니까.     


하지만 하루 이상 머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둘째 날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사건과 사고는 언제 어떻게 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예방할 수 있으면 미리 막는 게 좋지 않을까? 트라우마에 빠져서 괴로운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다. 치료보다는 예방이 더 좋은 것이니까.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일까? 나에게 없던 불면증이 생겼다.           



(엔딩곡)     


“Feels like insomnia ah ah. Feels like insomnia ah ah. Feels like insomnia ah ah. Feels like insomnia ah ah.”     


*Insomnia(불면증)

- 2009년 2월에 발매된 가수 휘성의 ‘Insomnia(불면증)’ 앨범, 1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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