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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DEN Oct 31. 2020

#14. 아저씨 이거 고급 스케치북이에요?


종일 일이 풀리지 않았던 날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선 나에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딸 

아이는 반갑게 달려와 스케치북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아마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서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아빠에게 스케치북을 선물하고 싶었고, 

문구점 아저씨한테 물어물어 이 스케치북을 골랐다고 한다. 

 

“아저씨 스케치북 있어요? 

이거 고급 스케치북이죠? 

화가들이 쓰는 거 맞죠? 

이거 원래 비싼 건데 여기서만 싸게 파는 거죠?”


한 바탕 질문을 쏟아내고 사온 스케치북이라며 조절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뭉클하고 고마운 마음에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아빠, 원래 이거보다 좋은 게 있었는데 그건 6천 원이래 이건 3천 원짜리야”

 

비록 서툰 그림을 그리는 아빠였지만 꾸준히 그리는 모습을 

본 아이의 눈에는 아빠가 멋진 예술가처럼 보였거나,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스케치북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날 밤 정말로 예술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작은 노트에 낙서처럼 끼적인 그림들만 가득했지만 그것들은 나를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고, 

나에게 그날은 강력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꾸준함은 그 행위 자체로 나를 어느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가 아닌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쌓여 만든 이야기가 되어 

잘하는 사람이 아닌 멋진 사람이 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물론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서적으로 건강했고, 

어떤 것에도 조급해하거나 욕심을 내는 일도 없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하루의 시간들을 충실하고 만족스럽게 보냈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대단한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난 일이었지만 나는 늘 대단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이 강해질수록 조급했고, 맘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질책하고 다그쳤던 것 같다. 


나는 이전과는 다른 결로 살아 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성실한 남편으로, 아빠로, 

한 회사의 직원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에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되면 회사에 남아 있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와 어울려 놀고, 아내와 즐거운 대화들을 나눴다. 

주말이 되면 함께 나들이를 가고,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갔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니 오롯이 가족과의 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숙제를 하듯 가족들을 대하지 않으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과 즐거움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마치 이제 막 원하던 가정을 꾸린 듯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했고, 

모든 삶이 완벽한 듯했다. 


나는 30대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저 고되고 무거운 시간들이었는데 그런 시간들을 회복하라는 듯

30대의 마지막 시간들이 보물 같았다. 


이제 이대로만 살자 싶었다. 

큰돈을 벌지 못해도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자 그거면 되겠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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