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둥이 오빠의 행방불명

by 글마루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았다. 녹은 물이 마를 때쯤이면 삽작* 머리 미루나무에도 새순이 돋았다. 뒷산은 일제 강점기 때 무분별한 벌목으로 군데군데 머리 벗어진 대머리처럼 불그레한 맨 살갗을 드러냈다. 뒤늦게 심은 소나무는 아직 어린아이 같고 산허리 부근은 붉은 황토로 된 땅이 넓었다. 야트막한 뒷산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나 진배없었다.


윗집에는 두 살 위 언니와 한 살 위 오빠가 있었다. 언니는 손끝이 야무져 아홉 살쯤부터 밥을 지었고 오빠는 좀 아둔하지만 순한 양이었다. 난 언니,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며 그들과 어울렸다. 철이 들기 시작하며 언니에게는 언니라고 불렀지만 오빠에게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냥 이름을 불렀다. 한 학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인지 오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면 너무 순하기만 하니 오빠라고 하지 않아도 내게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으니 겁이 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시골에는 위아래 두 살까지는 친구처럼 어울려 놀았다. 눈만 뜨면 마주하는지라 지금처럼 같이 놀 친구 걱정은 하지 않던 때였다.


미루나무에 봄바람이 살랑인 날이었다. 윗집 언니, 오빠가 뒷산 붉은 언덕 자리로 소풍 가자고 했다. 벌써 자기네 몫의 도시락을 챙겨서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한테 소풍 간다고 도시락을 싸달라니 어린 것이 어딜 가냐고 야단만 치셨다. 그들은 울고 있는 내게 그냥 자기네 도시락 같이 먹으면 된다며 달래줬다. 마치 친언니, 오빠처럼 다정하게. 그때 난 옥양목 천을 떠 엄마가 손수 만들어 준 반바지 겸 팬티를 입고 있었다. 흰 바탕에 빨갛고 까맣고 파란 동그라미 무늬의 속옷이 고왔다. 언니는 누가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줬느냐며 내 관심을 돌렸고, 난 못이기는 척 훌쩍거리며 윗집 오누이를 따라나섰다.


산이라야 워낙 야트막해서 잠깐만 오르면 그 황토 언덕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거긴 잡풀도 없었고 붉은 황토가 융단처럼 폭신했다. 난 그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줬고, 가장자리는 이제 막 땅 기운을 받은 어린 소나무들이 소담스러웠다. 마치 그곳은 나만의 무대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우린 가져간 삶은 감자를 맛있게 먹고 거기서 한참을 머물다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가지 말라는 데 갔다고 다시 잔소리를 했지만 바람을 쏘이고 난 나는 잔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내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 더 거기를 찾아가곤 했다. 유난히 붉은 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키보다 작고 오종종한 소나무가 정겨웠기 때문인지 그 산의 붉은 흙은 내내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윗집 오빠는 나보다 훨씬 덩치가 컸지만 너무 순하기만 했기에 윗집 아주머니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 아주머니는 딱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너무 아둔하다며 늘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반면에 딸은 귀히 여기셨다. 남들보다 똑똑하지 않고 조금은 덜떨어져 보이는 아들이 걱정되셨든지 가끔 푸념을 늘어놓고는 했고 사정없이 나무라기도 했다. 오빠의 엄마가 그러니 우리가 무시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좀 당돌한 편인 나는 주먹이나 작대기로 오빠의 머리를 때리고는 했다. 물론 힘으로야 나보다 훨씬 세지만 오빠는 그렇게 내게 당하고도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까불면 가만 안 둔다고 말로만 그럴 뿐이었다. 그 속내를 읽은 나는 그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오빠를 놀려댔다.


오빠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같이 버스를 타고 통학했지만 난 말도 못 붙이게 쌀쌀맞았다. 무슨 질문이라도 하면 독사처럼 달려들 듯 쏘아댔다. 그 당시 내겐 말 붙이는 것도 싫었다. 남보다 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랑 아래윗집으로 살았다는 것조차 창피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공부는 뒷자리를 맴돌고 집에 오면 아주머니께 갖은 꾸중과 핀잔만 듣던 오빠는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학교 간다고 한 뒤로 종적이 묘연했다. 물론 그때는 우리도 기와집으로 이사 가고 그 집도 건넛마을로 이사 간 후였다. 그랬기에 속속들이 내막을 알지 못했다. 오빠가 가출한 것이다. 아저씨는 오빠를 찾으러 구미로 왜관으로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친구들이나 누가 어디서 봤다는 제보라도 있으면 부리나케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순하디순한 아저씨와 달리 아주머니는 덩치가 씨름선수 저리가라할 만큼 컸고 좀 심술궂은 성격이었다. 아래윗집으로 살 때도 우리가 텔레비전이 없어 보러 가기라도 하면 눈을 흘기며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다. 가난한 우리 집을 업신여기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린 우리에게 거리낌 없이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고는 했다. 우린 아주머니가 무서워 집을 비울 때만 그 집에 갔다.


아주머니는 딸 하나 있는 집에 재취로 들어왔는데 큰딸은 일찍 공장으로 보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언니는 중학교 입학금만 보태달라며 빌며 부탁해도 입학금을 보태주지 않아 언니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큰 덩치에 게다가 계모에 심술궂은 마음씨를 보며 어린 난 꼭 콩쥐팥쥐에 나오는 팥쥐 엄마가 연상되었다. 아마 팥쥐 엄마가 꼭 그 아주머니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상상하고는 했다.


아무리 미욱해도 자기 배로 낳은 자식에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라졌는데도 아주머니는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웃들이 걱정하기라도 하면 지금 있는 딸 둘만 있으면 되었고, 없어도 된다는 말로 잘랐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는 수군거렸다. 아무리 바보 같은 자식이라도 마음이 아파야 정상인데 어찌 저리 매정하냐는 한결같은 말이었다. 잘나나 못나나 내 자식인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도 말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OO는 지게 목탁이나 두드려야겠다.”라며 변변치 않은 아들에 대한 실망이 큰 듯 보였다.


지금도 오빠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짐작으로 새우잡이 배에 잡혀갔다고도 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한다. 아저씨는 아들 생각으로 눈물짓는데 아주머니는 찾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낳아준 친엄마가 얼마나 구박이 심하면 그 순한 아들이 집을 나갔겠냐는 말이었다. 오죽하면 집을 나갔으며, 나갈 때는 다시 구박받기 싫은 마음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떠났다고들 입을 모았다. 아주머니는 늙어 백발이 성성할 때쯤 되니 아들을 찾으며 울더라는 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딸들도 모두 출가하고 두 부부만 남겨지게 되었고, 딸이 아무리 잘하려고 한들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서 정서가 아들만 못하다. 마음이야 딸도 귀하겠지만 아들은 의무적으로라도 부모를 섬겨야 하는 인식이 남아있다. 아주머니는 아들을 진정으로 아낄 줄 모르는 분 같았다. 수많은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평생을 뒷바라지도 모자라 자신들 사후 남겨질 자식 걱정에 괴로워한다.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참 안타까웠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표독스럽게 오빠를 대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사실 마음으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오빠가 매번 져주니 그게 습관처럼 굳어져 만만하게 여겼다.


오빠도 살아있다면 한 번쯤 고향 생각이 나지 않을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오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닌지, 만약 살아있다면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 한 번이라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니 부모는 자식의 상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내 자식이 웃으면 나도 웃고, 내 자식이 우울하면 덩달아 우울해지는 것이 부모이다. 만약 나중에라도 만나게 된다면 나 또한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진정 마음이 담긴 사과를 꼭 하고 싶다.


언제인가 옛 추억을 더듬어 뒷산을 올랐다. 거기 황토자리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자리를 펴고 앉아 그 시절 한없이 평화로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거기에 가면 내 집처럼 편안할 것 같았다. 사람들도 떠나고 촌로들만 간간이 지키고 있는 시골은 나무들만 우거져 무성해졌다. 길도 없었고 그 자리를 찾을 수도 없었다. 어린 소나무는 보이지도 않고 온통 가시나무만이 뒷산을 점령해버렸다. 나는 헛헛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시는 그 붉은 흙을 밟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그건 오빠가 다시 돌아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 오빠는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 머물고 있을까.


*삽작: 사립문의 경상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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