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 사격중지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1950년 6월 25일 서희가 열 네살 되던 해 전쟁이 났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의정부를 통해 미아리를 넘었고 분옥과 서희는 그대로 서울에 갇혔다. 해방 후 분옥은 이화학당 동문의 추천을 받아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었다.


분옥은 전쟁이 난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고 더 먼저 피난을 갈 수 있었지만, 어린 서희를 데리고 홀 몸인 여자가 피난길을 나서기도 쉽지 않았다. 분옥은 미군을 믿었다. 얼마간만 버티면 서울이 수복되리라고 믿었다. 식량을 비축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틸 심산이었다.


며칠 후 서울이 완전히 점령되고 얼마가 지났을까. 누군가 요란하게 분옥의 집 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분옥은 서희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문을 박차고 들어와 분옥을 끌고 갔다. 누군가 분옥을 밀고했다.


분옥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어찌할 변명도 없이 미제 앞잡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분옥은 그 와중에도 서희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고, 묶여서도 악을 쓰고 서희를 불렀다. 도망가라는 것인지 오라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절규였다. 분옥은 열댓 명의 사형수들과 섞여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가린 채 머리를 박고 있었다. 분옥의 울음은 점점 신음이 되어갔다.


그때 누군가 사격중지 사격중지를 외쳤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종대였다. 종대는 얼이 빠진 분옥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서희도 있었다. 분옥은 이것이 꿈이거나 저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종대의 군복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오고 가슴을 파고드는 서희의 숨을 받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날 밤 분옥은 종대에게 밥을 지어 올렸다. 서희가 옆에서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종대와 분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옥에게는 분노도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희는 슬금슬금 종대의 곁으로 다가간다.


"독립군의 아내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오?"

"미안하오"

"해방이 되었거든 이리 살아 있으면서 어떻게 우릴 버렸소?"


종대는 아무 말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 말을 좀 해봐요. 아무 말이라도"

"만주 사막 어느 동굴에서 인육을 먹으면서 살아남았소. 그리고 해방이 되고 소비에트로 넘어가 어찌어찌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전쟁이 났구려"


"미안하오"


분옥은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그저 종대를 멀건이 쳐다볼 뿐이었다. 인육을 먹고 살아남았다니 그 겨울 만주 기차간에서 서희를 끌고 지나쳐야 했던 그 기막힘을 더 말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한동안 분옥과 서희는 지나간 세월이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저녁이 되면 종대는 돌아왔고 분옥은 저녁을 지었다. 서희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종대의 군복을 벽에 걸고 쌜쭉거리며 하루 종일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채 석 달도 버티지 못했고 점령을 할 때처럼 다구치 게 서울을 버렸다. 종대는 떠나고 서울은 다시 돌아왔다. 정대는 분옥과 서희를 북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분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보! 서희 아버지 나는 이념을 몰라요"

"하지만 또다시 당신을 찾아 서희를 데리고 벌판을 헤맬 수는 없어요"

"이젠 당신이 오세요"

"전쟁을 끝내고 오시든 전쟁이 끝나고 오시든 우린 여기서 있을 테니 그때 이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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