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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설 Feb 27. 2024

물 새는 집

  누수가 발생했다. 벌써 세 번째다. 


  흐린 눈을 하고 못 본 척 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 집에 이사 온 지 만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 번째라니... 베란다 한 쪽 벽 페인트가 습기를 머금고 쭈글쭈글거리며 한데 뭉쳐있었고 손으로 만져보니 축축하기까지 했다.  



  첫 번째 누수는 이사를 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발견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베란다에 탄성코트라는 페인트를 새로 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베란다 천장 군데군데에 손바닥 크기만큼 약간씩 부풀어 있었다. 인테리어 사장님 얘기로는 오래된 아파트이기에 건물 외벽에 생긴 틈새로 비가 들어왔거나 윗집 누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관리소에 알려서 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관리소에 연락을 하니 직원 둘이 우리 집에 방문했고, 누수 흔적을 보자마자 윗집 문제라고 말하며 윗집에 가보겠다고 했다. 몇 분이 지나 관리소 직원들이 열고 간 문 사이로 어떤 여자 한 명이 나를 노려보며 집 안을 향해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저 여자는 누군데 말도 없이 들어오나, 왜 나를 노려보는 건가, 당황한 사이 여자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더니 집 안 쪽까지 들어왔다. 더욱 당황한 나는 혹시 윗집에서 온 거냐고 물었고 그 여자는 그제야 입을 떼며 맞다고 대답했다. 뒤늦게 따라 내려온 관리소 직원들과 함께 여자는 우리 집 베란다 천장에 생긴 누수 흔적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를 흘겨보며 “여태 아무 일도 안 생겼는데 이 사람이 이사하고 나서는 왜 이러는 거야.”, “안 그래도 인테리어 공사소리 때문에 시끄러웠는데.” 라고 말했다. 


  인테리어 공사 전, 이사를 앞두고 있는데다가 일까지도 몰려 바쁜 일정 탓에 이웃집에 직접 방문하여 양해를 구하지 못했고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에게만 맡겨두어 마음이 쓰였었다. 하지만 윗집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미안했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관리소 직원은 윗집에서 누수 탐지 업체를 불러야 하는데 업체에서는 두 집 모두 살펴봐야 하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윗집 여자는 그냥 나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왜 그냥 가냐 붙잡았더니 본인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고 “연락처 하나 적어줘 보던지.” 라고 화가 난 말투로 말하는 거였다. 나 또한 그녀의 말에 맞받아치며 내가 이사한 것과 누수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연락처를 알려주든 언제 업체를 부를 건지 당장 알려주든 하라고 함께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 여자는 연락처 주기 싫으면 말든가, 라고 짜증내며 나가려 했고, 결국 나가는 그녀의 뒷통수에 대고 “바로 업체 안 부를 거면 법대로 해요.”라는 내 외침으로 끝이 났다. 부푼 천장은 아직 그대로인데, 다행히 약간만 커졌을 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두 번째 누수는 주방 쪽 벽에서 발생했다. 벽지는 젖었고 곰팡이마저 생겼으며, 벽에 맞대어 있는 바닥에는 벽을 타고 흐른 누런 물이 조금씩 고이기도 했다. 관리소 직원들이 보고 갔고 윗집에도 얘기는 했다지만,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럴 경우 윗집으로 가서 직접 얘기하면 싸움만 난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있었고, 또 이전에 다툰 전적이 있었기에 윗집 여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몇 번씩이나 관리소에 중재 요청을 했지만, 관리소든 윗집이든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결국 따로 살고 있는 우리 아빠까지 나서서 관리소에 연락을 하자, 버티던 윗집은 그제야 결국 누수 탐지 업체에 연락했다. 누수탐지 업체 기사를 부르고 보니 윗집 문제가 아닌 아파트 공용 부분에서 누수가 발생한 거였고, 손상된 우리 집 벽지는 관리소에서 새로 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관리소에서는 한 집의 벽지 때문에 사람을 바로 부를 수 없고, 금전적인 보상으로는 불가하다며 시간을 끌었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곰팡이가 집 안에 점점 번질까봐 계속 신경이 쓰였다. 관리소에 몇 번이나 재촉 전화를 했지만 기다려보라는 말 뿐이었다. 몇 달이나 지나, 결국 장마가 시작될 시기에 도배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한 번 누수가 생기면 신경질 나는 지난한 시간을 겪어야 한다는 걸 이미 겪어본 탓에 이번에 또다시 누수 흔적을 발견했을 땐 정말이지 이 집을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이사 갈 당장의 계획도 없으면서 이사 갈 때까지 버틸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수가 생긴 집은 다른 사람이 이사 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버텨봤자 나만 손해라는 계산이 서자, 굳은 마음을 먹고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고 이번에도 직원들이 보러왔다. 본인들이 보기에는 윗집 누수보다는 외벽에서 생긴 누수일 것 같은데, 누수 탐지 업체에서 보고 외벽에서 발생한 누수가 맞다는 걸 알려주어야 작업을 해줄 수 있단다. 


  며칠 뒤 내가 부른 누수업체 사장님은 기다란 막대에 달린 거울로 외벽을 이리저리 비추어보더니, 외벽 문제가 아니고 결로 같다고 했다. 환기를 잘 시키더라도 이렇게 심하게 생길 수 있단다. 결로도 문제는 문제지만, 누수가 아니라서 윗집이나 관리사무소와 더 이상 실랑이 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입 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누가 보상을 해주는지, 언제 해줄 건지 다툼과 하염없는 기다림 없이, 내가 원할 때 인테리어 업체에 연락해 우리 집 벽만 단열공사를 하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돈은 들겠지만... 



  혼자 산다는 건, 누수를 비롯한 이런 복잡한 일을 홀로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때론 버거워서 회피하고 싶어진다. ‘젊은 여자’인 내가 관리소에 연락해도 진행되지 않는 일이 아빠가 전화했을 땐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처리해주는 걸 지켜보면, 허탈해지기까지 한다. 여자 혼자 사는 게 이렇게 불편하고 억울할 일인가. 집을 구하러 부동산에 다닐 때에도 나 혼자 갈 때와 아빠와 동행해서 갈 때 중개인들의 태도가 달라진다고 느꼈는데,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여러 번이었고, ‘젊은 여자’인 친구들에게 물어도 비슷하게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임대인이나 부동산과 소통해야 하는 굵직한 상황들은 남편에게 맡긴다고. 


  하지만 혼자 사는 게 좋고 이렇게 살기로 결정한 이상, 난 이 복잡하고 억울해지기까지 하는 일들을 여자인 내가 혼자 책임지고 감당하자고 다짐해본다. 어떤 행복이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선 늘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맞닥뜨린다면 그때에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원하는 삶의 형태를 포기한다면 행복과는 점점 멀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수든 결로든 이 복잡한 일이 다시는 안 생겼으면 좋겠다. 인생이 좀 더 수월했으면 좋겠고…….

 



누수로 착각했지만 결로였던 현장....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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