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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설 Mar 01. 2024

그곳으로 가고 있어

  인터넷에 떠도는 MBTI 설명 중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J(판단형)에 관한 설명이다. 예를 들어 J형인 사람은 계획을 짜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기에 여행지도 세세하게 조사하고, 무슨 요일, 몇 시에 뭘 할지 여행 계획도 철두철미하게 짠다는 것이다. 


  사실 심리학 분야에서 MBTI는 그리 신뢰할 만한 심리검사는 아니라고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의 성격 특성을 충분히 잘 설명한다는 통계적 타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심리검사 수업시간에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또한 MBTI는 스스로가 인식하는 모습(그게 실제인지와 상관없이)만 반영되기에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그 결과가 바뀌기도 쉽다.  


  내 MBTI 유형도 매번 조금씩 달라졌는데,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건 J 뿐이다. 과학적인 사고와 판단이 필요했던 대학원생 시절과 임상심리 수련생 시절 때는 ISTJ였는데, 공감과 감성이 중요한 심리상담을 주업으로 삼게 된 이후로는 INFJ로 바뀌었다. 대학생 때는 INTJ였나, ISFJ였나 그랬던 것 같다. 최근에는 ENFJ도 나왔다. 굳건히 변하지 않는 J를 보면, 찐 J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여행 특성’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나는 여행 계획은 세밀하게 짜지 않는다. 평소 하루 계획만 열심히 짤 뿐이다. 



  병원에서 2년 간 수련을 마치고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내 계획은 이런 식이었다. ‘로마 인, 밀라노 아웃. 며칠 동안 로마 여행을 하고, 나폴리에 갔다가 남부에 있는 소렌토랑 포지타노에 가야지. 그 다음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순으로 여행하는 게 좋겠어.’ 왕복 항공권과 처음 도착지인 로마 숙소를 예약하고, 도시 별로 어디를 가보고 싶은지 정도만 대략 찾아보면 여행 준비는 끝난다. 대강의 루트만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다. 한 도시에 얼마나 머물 건지조차 계획을 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내일의 내가 뭘 하고 싶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날은 박물관에 가서 머리와 마음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싶을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한가로이 테라스 카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을 때가 있다. 여행지가 어떨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내일의 내 기분과 몸 컨디션이 어떨지 모르는데 여행 계획을 미리 짜는 건 무리다.


  뚜렷한 계획이 없는 여행 스타일 덕분에 좋아하는 곳에 더 머물며 여행할 수 있었다. 나흘 정도 머물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피렌체에서는 일주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고즈넉한 쏘렌토에서는 바다 풍경에 한껏 마음을 빼앗겨 해가 질 때까지 그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수련 직후 떠난 그 여행에서 바닷가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사치스럽고도 감사해 눈물을 흘리며 청승을 떨기도 했다.



  20대 초반쯤이었나. 대단히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의 블로그를 우연히 방문하게 됐다. 그녀는 올해 목표와 내년 목표 뿐 아니라, 5년 뒤, 10년 뒤의 목표를 정해둔다고 했다. 그녀를 따라, 스물다섯에 대학원에 입학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스물여섯에 입학했다. 다음 목표는 대학병원의 3년 수련 과정에 들어가는 거였다. 목표와는 달리 차선책으로 두 군데의 병원에서 나누어 수련을 받았다. 행운이 내 주변에 있을 땐 예상보다 빠르게 원하는 것을 손아귀에 쥐기도 했지만, 어떨 땐 계획했던 것보다 아주 느리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원하던 것보다는 좀 못한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했다. 


  몇 살에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단점이 더 컸다. 굳이 빨리 달려갈 필요가 없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좌절하게 됐다.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빠르게 달려가다 보면,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놓치게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도 계획에 따라 움직이려고 하다보면, 바닷가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는 소중한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처럼, 내 삶에서도 가고자 하는 방향과 목적지 정도만 정해두는 편이 낫다고 느낀다. 그곳에 언제 도달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을 거고, 전력질주도 하지 않을 거다. 천천히 걸어가는 방법이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걸 안다. 가는 도중에 풍경 좋은 바닷가 벤치를 발견한다면 여유를 부리며 쉬어갈 테다. 목적지를 향하는 그 과정도 나는 행복해야 하니까. 지금 나는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심리치료사로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것.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 느리더라도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 전공 공부도 지금처럼 계속 하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해야지. 술은 조금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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