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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리 Oct 19. 2022

'추자'가 '호두'라고요?

호두가 익어가는 계절



"추자 언제 따여 - 이제 따야 돼"

"네? 어떤 거요?"

"추자 말이야 추자!"


아랫집 할머니가 올라오셔서는 추자를 따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처음엔 도대체 뭘 얘기하시는지 몰랐다. 할머니의 손 끝이 가리키는 건 마당에 있는 호두나무였다. 호두가 어떻게 생긴지는 알아서 호두나무인 건 알고 있었지만 벌어지고 있는 호두 껍질을 보면서 언제 따야 하나 하던 참이었다.


그때 알았다. 이 동네에선 호두를 '추자'라고 부른다는 걸.


 탁구공 만한 초록색 열매. 외가 뒷마당에 있던 호두나무의 모양새가 떠올랐다. 겉껍질을 잘못 까면 손에 물이 들어 밤처럼 신발로 껍질을 깠던 기억이 났다.


첫 해에는 할머니 말씀을 듣고 부랴부랴 호두를 털었다. 그동안 사랑채 옆에 놓여있던 용도가 불분명한 긴 쇠파이프가 호두를 터는 막대였다는 걸 깨달았고, 창고를 뒤졌더니 큰 천막 같은 게 나왔다. 나무 아래에 천막을 깔고 호두를 털었다.



나무가 커서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남편과 둘러앉아 장갑을 끼고 호두를 줍고, 아직 초록 껍데기가 덜 벗겨진 것들은 껍질을 까거나, 발로 밟아 터트렸다. 할머니 말씀이 물에 '바락바락'씻어서 말려야 된다고 알려주셔서 호두를 열심히 씻어 햇빛에 널어두었다. 얼마나 말려야 되는지 몰라 마당에 일주일을 넘게 두었다가 하나씩 까서 먹어보고 적당히 말랐다 싶을 때 거둬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바삭하고 쌉쌀하면서 고소한 맛. 그동안 먹던 호두 맛이 아니었다. 추억이 생각나는 고소한 맛이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손에 쥐고 굴리시던 기름이 반질반질하게 칠해진 호두알이 생각났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꽃을 피우고 이렇게나 많은 열매를 맺은 게 신기하기도 기특하기도 했다.


집에 두고 처음에는 그냥 까먹다가 호두정과 같은 캐러멜 호두를 만들면 맛이 좋을 것 같아 만들어서 아랫집 할머님 댁에도 나눠드리고 책방에 놀러 오는 지인들이나 손님들에게 조금씩 포장해서 나눠줬다.


새 호두가 나오기 전까지 집에 손님이 놀러 왔다 갈 때면 빈손으로 보내기 뭐해 호두를 한 봉지씩 담아서 보내기도 했다. 고소한 호두를 나눠주는 게 참 좋았다. 그렇게 호두가 떨어져 갈 때쯤이면 다시 가을이 온다.


올해로 3번째 호두를 털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호두가 다 벌어져 떨어지고 있는데도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바쁜 대로 매일 아침 바닥에 떨어지는 걸 줍고 날을 잡아 털었다. 또 고소한 것들이 잔뜩 떨어졌다.


이젠 제법 요령이 생겨 벌어지지 않은 호두는 그 채로 며칠 두면 수분이 날아가 껍질이 잘 까진다. 강제로 껍질을 까려고 하면 손은 손대로 검어지고 제대로 벗겨지지 않은 호두는 껍질이 붙어서 마르면서 검은색이 군데군데 물들어 지저분해진다.


시골에 와서 배운건 모든 건 때가 있어서 급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물론 때를 지나쳐도 안되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내년부터 아랫집 할머니 댁 호두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젊은데 열심히 산다며 좋게 봐 주신덕에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우리한테 임대를 주셨다. 그렇지만 걱정이 되시는지 “바빠서 추자 농사짓겠어?”라고 문득문득 말씀하신다.


“그럼요. 해 볼게요. 그리고 저희가 추자 많이 따서 드릴게요”라고 대답했더니, “나 줄 생각 말고 갖다 팔아. 안 줘도 되니까.”라고 대답하셨다.



호두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지금이 나에게 어떤 ‘때’인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때에 내려와서 문경에서 보내는 시간들도 조금씩 여물어 간다.


지붕에 올라가 호두를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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