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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리 감성돈 Feb 21. 2020

3천원의 따스함

2020년 2월 20일- 나로 살기 51일째-


20대 때 겨울만 되면 장갑을 사고는 했다. 원래 관리를 잘 하지 못하고 잘 잃어버리는 성격탓에 매년 겨울은 오지만 그때마다 장갑은 종적을 감추고 다시금 사야하는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겨울이 오면 백화점에 갔다. 장갑은 세일가에 판매되고 있었고 장갑을 파는 부수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격 대비해서 여성스럽고 젊은 느낌에 너무 저렴하지만은 않은 장갑을 택했다. 적정선은 5만원대로 맞추고 장갑을 구입했다. 그리고 한철 잘 쓰고 다녔다. 그런 일상에 젖어들었다.  


이년 전, 아버지께서 겨울을 대비하러 방한용품들을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 공황장애가 온 후 직장생활은 전무하고 백수로 살고 있던지라 새로운 것들을 사러 가자는 제안은 생각보다 기뻤다. 시골 동네에서 벗어나 서울로 갔고, 내 눈 앞에 백화점이 보였다. 아버지는 차를 몰고 백화점이 아니라 그 옆 시장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지금부터는 내가 상상했던 예외의 상황이라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는 시장길을 따라 걸어가셨고 리어카에 장갑을 팔고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가장 무난하면서 이런 것도 요새 파나... 싶은 회색 장갑을 골라서 이거 꽤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얼마 못 쓰고 보풀이 일어날 것 같고 다 헤질 것 같은 장갑을 골라서 이것을 사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며 기쁜 표정을 지으시는 아버지를 보고 난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기분이다. 네 것도 사줄게. 색감 골라봐” 

즐거워하시는 아버지 모습에 흥을 맞춰 드리고자 난 억지로 빨간색 장갑을 골랐다. 검은 비닐에 아버지것 회색 장갑, 빨간 장갑을 넣어서 주셨고, 아버지는 현금으로 6천원을 계산했다. 그 검은 비닐이 너무나도 창피하고 화끈거렸다. 당연히 장갑은 백화점에서 구입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난 것이다. 집에 가져와서 비닐봉지 채 방 어딘가로 집어 던지고 내심 기분이 풀리지 않아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겨울은 깊어 갔고 어느날 아버지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그때 보았다. 아버지께서 회색 장갑을 끼고 나갈 준비를 단단히 하신 모습을. 아버지는 맨손인 나를 보시고 지난번에 구입한 장갑을 끼고 나오라고 하셨다. 그제서야 어딘가에 비닐채로 던져 둔 장갑을 찾았고 아버지 앞에서 끼는 흉내라도 내야지 하면서 장갑을 꼈다. 


‘어... 이거 왜 이렇게 따뜻하지?’ 

처음 느꼈다. 장갑의 온기를. 그리고 3천원짜리 장갑을 부끄러워하던 내 모습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시장으로 걸어가는 길이 초라해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다. 내가 그동안 겉멋만 들었었구나. 실온성 있는 것들, 속이 꽉 찬 배추를 알아보지 못하고 겉만 좋다고 맛도 좋을 거라고 착각했구나. 3천원 짜리 장갑을 낀 내가 백수고 가난한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던 내 마음이 참으로 가난했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빨간 장갑은 겨울 내내 나와 함께였다.  


2019년 11월 겨울 방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트에 갔다. 장갑이 제일 저렴한게 1만 2천원이고 조금 좋아 보이는 게 2만 7천원이였다. “어머나, 세상에, 시장에 가면 3천원에 따뜻한 장갑들이 기다리고 있는 데 방한성도 좋아 보이지 않는데 왜 이렇게 비싸지?” 

그리고 지난 겨울 빨간 장갑을 생각했다. 그래, 그거 아니면 안되겠어. 마트에서 빈 손으로 돌아와 서랍 여기저기를 뒤져보았다. “나 여기 있어요” 수면 양말과 같이 빨간 장갑이 발그레 하게 나에게 인사하며 있었다. “너도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렇게 나는 장갑과 조우했고, 그 안에 아버지의 미소를 떠올렸다. 이 작은 물건 하나에 기쁨을 갖고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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