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늦추다

(3) 통영 여행기(2019년 7월)

by 서지현

뒤늦게 쓰는 통영 여행기(2019년 7월)

# 2019 제2회 길 위의 꿈 여행 수필상 길벗상(최우수상) 수상 작품입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자리한 도시, 통영. 통영은 느릿느릿, 찬찬히 둘러보기에 꼭 알맞은 도시였다. 어느 곳을 가나 찾아드는 인파로 번잡스럽지 않아 도시는 편안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기 위해 일부러 빽빽하게 일정을 짤 필요가 없었다. 날씨, 아이들의 컨디션 등 그날의 형편을 보아가며 움직이면 됐다.


동피랑.jpg
이순신공원.jpg
동피랑마을과 이순신 공원, 박경리 생가가 지척 간이다.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은 통영에는 명소가 오종종 모여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하루 일정으로 둘러본 동피랑 벽화마을, 이순신공원, 박경리 생가 터와 문학관 등은 지척 간이었다.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통영이 주는 정취와 여유를 만끽했다. 지나왔던 길을 또 지나치기도 했고 같은 길을 맴맴 도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느리게 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아빠그리는지후.jpg 수염 자란 아빠가 멋지다며
20190819_205320.jpg 아들이 그린 수염 난 아빠 초상



남편은 통영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수염을 기르겠노라 했다. 남편이 매일 면도 행위를 의식처럼 치른 후 출근하는 것을 나 역시 당연시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보면 그는 삶의 시간을 ‘하루’ 단위로 쪼개어 주어진 의무를 치러내느라 숨 가쁜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삐죽 돋아나기가 무섭게 면도날의 공격을 받아야 했던 남편의 수염이 오래간만에 기를 펴고 자라났다. 수염 속에 폭 파묻힌 그의 얼굴은 제법 분위기 있었다. 전에 없이 그가 한결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시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 얻게 된 느긋함 덕분이 아닐까.



아파트 환경에서 하루하루 주눅 들어 살던 아이들은 탁 트인 통영 앞바다에서 대장 노릇을 했다. 시야에 거칠 것 하나 없이 아득히 멀고도 드넓은 바다, 아이들은 그곳에 대고 ‘와아’ 하고 호기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모래사장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려도 본다.



20190813_173150.jpg 해 떨어지는 줄 모르고


이내 아이들은 바닷가에 질펀하게 퍼질러 앉아 바위에 딱 들러붙은 따개비를 따며 놀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았을까. 바다의 찝찔한 소금기에 온 몸이 저려진 후에야 문득 깨닫는다. 해 떨어지게 노는 동안 우리는 시계 한번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몇 시인지, 시간이 얼마쯤 지났는지 따져 물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시간을 조각내어 살아가는데 익숙한 아이들이 이날만큼은 자연의 품에서 한없이 한가롭고 느긋하게 한낮을 보냈다.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 물결, 그리고 구름의 움직임과 호흡을 같이 했다. 그렇게 우리의 호흡과 맥박은 느려져 갔다.





밤이면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통영의 식당과 카페들은 웬만하면 일찍 문을 닫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서울 밤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어두컴컴한 통영의 밤거리가 낯설기만 했다. 한참 동안 인터넷을 뒤져 늦게까지 영업한다는 한 카페를 겨우 찾아갔다. 분명 마감시간을 10시라고 명시하고 있었지만 9시 30분이 되자 주인은, “저희 이제 문 닫으려고요” 하면서 자리를 떠 주십사 하고 양해를 구했다. 기분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더 의외였던 건 남편의 반응이었다. 누구보다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이기에 화를 낼 법도 한 상황이었건만 그는, “이곳 통영 분위기가 그런가 봐. 우리 여행자가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했다. 여유를 품은 도시 통영에 머무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실로 크나큰 변화였다.




풀벌레소리숙소.jpg 쉬이 잠들지 않은 밤,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며




대신 우리는 일찌감치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펜션은 사위가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에 무척 가까이 자리한 곳이었다. 쉬 잠이 들 리 만무한 시각, 뜻하지 않게 우리는 오래도록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가깝고도 먼 어디선가 저들만의 비밀스러운 향연이 시작되면 난 잠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미물은 저마다의 음색과 떨림으로 늦여름 밤공기를 영롱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여리면서도 섬세하게, 가냘프면서도 구슬프게. 준비된 곡조도 지휘자도 없는 저들의 협연은 오묘하고 조화로웠다. 작은 새들의 지저귐 같기도 했고, ‘파르 파르 파르르르’ 작은 날개들의 떨림 같기도 했다. 다만 그 음색이 반짝이는 은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찢어발기듯 울어재끼던 여름 한낮 매미 울음이 일시에 무색해졌다.



'톡', '톡'.

그치다 만 빗방울 떨구는 소리가 간간히 더해지노라면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운 님이라도 있었더라면 어찌했을까. 귀를 간질이던 소리는 불쑥 가슴 밑바닥을 치고 들어와 있었다. 풀벌레 소리에 흠씬 두들겨 맞은 가슴이 문득 깨닫는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잠자리에서나마 그렇게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곤 했다. 통영에서 맛본 더없이 행복한 밤이었다.



# 2019 제2회 길 위의 꿈 여행 수필상 길벗상(최우수상) 수상 작품을 몇 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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