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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18. 2022

이과 남편 문과 아내

예쁜 무언가 / 기술보단 매혹이 필요한 법

"공대생들이 ①이거 두께 1mm 줄이려고 얼마나 고생하는데 이걸 ②이런 걸로 덮어 버는 거야!"
"이런 걸로 라니~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산 건데!"


남편 말의 첫 번째 ①이것은 핸드폰을, 두 번째 ②이런 것은 핸드폰 케이스를 말한다. 새로 산 핸드폰에 범퍼 케이스를 끼우는 나를 보며 남편이 한 말이다. 남편의 말 한마디엔 이해할 수 없음, 당황스러움, 어이없음 등의 감정이 포함돼 있었고, 나의 대답엔 갬성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남편에 대한 답답함이 녹아있었다.


그때 내가 산 핸드폰 갤럭시 S8의 두께는 8.1mm. 소수점까지 표기한 걸로 보아 얇아진 두께를 강조한 걸로 보인다. 빨강머리 앤 범퍼 케이스를 끼운 내 핸드폰의 두께는 12.9mm이었다.


내 남편은 물리를 전공한 전형적인 이과생,
나는 수학과 물리 때문에 점수 다 깎아 먹은 전형적인 문과생 되시겠다.  


내가 핸드폰 케이스를 사면서 고려한 것은 디자인과 범퍼 유무였다. 일단 예뻐야 하고 사방이 범퍼로 둘러 여 안전하게 핸드폰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난 왜 그런지 빨강머리 앤에 꽂혀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내가 빨강머리 앤쯤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즈음 다시 빨강머리 앤을 보는 성인들이 늘면서 나도 그때의 감성에 숟가락을 얹고 싶었던 모양이다.

핸드폰이 벽돌같이 두꺼울 때가 있었다. 스마트폰이 나온 뒤, 핸드폰은 더욱 얇고 가벼워졌다. 애플과 삼성의 언팩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떤 기술이 새로 추가됐는지 이슈가 되었고, 얇아 두께와 가벼워진 무게는 기술의 척도로 여겨졌다. 많은 개발자들이 야근해가며 만들었을 거다.


핸드폰에는 아무것도 끼우지 않은 게 가장 예쁘다는 것엔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떨어뜨렸을 때 액정이 깨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안 될 사람.


 케이스가 필요하단 얘기다. 기왕이면 예쁜 걸로 사자! 그러다 빨강머리 앤까지 간 거다. 나는 거기에 큼지막한 그립톡까지 붙였다. 남편은 물론 이 그립톡도 이해하지 못한다. (흥! 그립톡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쓰다가 안 쓰는 사람을 없을걸)

공대생, 아직도 모르는가? 개발자들이 야근해가며 얇게 만든 핸드폰을 결국 사람들은 1~2만 원 케이스로 덮어버린다는 사실을. 친구가 그랬가. 기술보단 매혹이 필요한 법이라고.

3년을 함께한 휴대폰이 고장 나 새 폰으로 바꾸면서 나는 폰 선정을 남편에게 일임했다. 사진만 잘 나오면 되니 스펙은 알아서 정하라고 하면서. 단 사기 전에 휴대폰의 색만 말해달라고 했다. 이과 남편은 며칠간 이것저것 재가며 스펙을 살피더니 내 핸드폰을 주문했다. 나는 핸드폰의 생김새를 훑어보고, 사진을 찍어보더니 이거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휴대폰 케이스와 그립톡을 골랐다.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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