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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민 Oct 17. 2023

경력이지만 신입입니다

밑바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심각한 중독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담배나 술과같이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보다 더 해로운 것. 나는 한때, 지독한 '공모전 중독' 환자였다. 글쓰기와 관련된, 가령 드라마나 웹소설 공모전 따위 말이다. 마음에 드는 공모전을 발견하면 내 눈에는 별이 박혔다. 처음에는 항상 '오, 시간 많네. 여유 있게 준비해도 되겠어.'라는 마음을 가지곤 했으나 막상 마감 기한이 다가오면 볼일 다 본 고양이가 앞발로 모래를 파내듯 우다다다다! 미친 듯이 타이핑을 한 뒤 막바지에 겨우 원고를 제출하곤 했다. '제출'이라는 단어보단 '세이프'가 더 맞을 것이다. 나는 야구선수도 아닌데 항상 마감을 향해 도루했다.


어마어마한 상금과 특전이 걸려 있는 그런 공모전. 당선되기만 한다면 넉넉한 금액의 돈과 함께 어깨 뽕이 치솟는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대상이니 최우수상 그런 단어들 말이다. 닳고 닳은 단어인데 왜 이렇게 설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도박 심리에서 시작된 원고에는 듬성듬성 빈틈이 참 많았고, 글의 흐름은 공원의 비둘기처럼 이리저리 갈피도 못 잡고 길을 헤매곤 했다. 아니, 내 글은 비둘기보다 못했다. 그들의 대가리 속엔 무려 GPS가 달려 있지 않은가. 반면 내 글은 무빙의 류승룡처럼 갈팡질팡 목적지도 못 찾는 길치였다.


아무렴, 인생은 한방이지


하지만 한방에 쓰러지는 건 늘 나였다. 

TKO 패. 경기 중단. 레프리는 시합을 속히 중단시켰다.


나는 웹소설 공모전에 도중하차했고, 자존심은 신문지처럼 구겨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웹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했고, 기회의 장이라고 생각했기에 다행히 내 마음까지 접히진 않았다. 그래서 난 밑바닥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비록 내가 10년 차 예능작가이지만 웹소설에선 신입이니까. 그렇게 난 웹소설 아카데미에 서류를 접수했고, 1차 합격을 해 면접에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면접이라니, 그런 것은 막내작가 때 말고는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마침내 면접 당일이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다시 새내기가 된 기분이었다(나는 대학교를 가본 적이 없지만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어쨌든 웹소설의 밑바닥부터 다시 배우는 수강생이 된 입장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중학교 때 배운 논어의 구절을 되새기며 나는 면접 장소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잠깐만.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면접관의 수가 기껏해야 두세 명인 줄 알았건만, 족히 6명은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면접자는 나 포함 3명. 분위기는 예상과는 다르게 딱딱하게 시작되었다. 무슨 대기업 면접  같았다(물론 대기업을 가본 적이 없지만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그렇게 면접이 시작되었고, 면접관들은 무작위로 돌아가며 질문했다. 특정 면접자에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공통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통은 '웹소설 아카데미에 지원한 이유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뭔가요?'와 같은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다 나에겐 '다른 일을 하다가 왔는데 웹소설을 택한 이유는?'과 같은 질문이 들어왔다. '방송일을 하면 남한테 굽신대야 해서요'라고 말할 순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모든 질문에 답했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 드라마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웹소설은 모든 콘텐츠의 원천 IP로 자리 잡고 있으며, 웹소설은 독자들과 직접적, 즉각적으로 소통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등. 또한, 그동안 웹소설 작품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소위 말하는 '인풋'이 적지만) 아카데미에 합격한다면 성실하게 읽고 분석할 것이다, 강사님들께서 가르쳐주시는 내용과 커리큘럼에 따라 초심자의 마음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등. 나는 어떤 질문에는 머리로 답하고, 어떤 질문에는 가슴으로 답했다. 중간에 한번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했지만, 짧은 명상으로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고맙습니다 인도). 중요한 건 내가 가졌던 간절함과 진실성을 토대로 답했어서 면접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질문 하나가 기습적으로 날아왔다.


Q) 당신은 천재형이라고 생각합니까, 노력형이라고 생각합니까?


무려 공통 질문이었다. 옆에 있는 면접자들부터 차례로 대답했다. 다행히 나는 그사이 답변을 생각했다. 하지만 갈피를 못 잡았다. 뭐라고 하지? 내가 보기에 나는 천재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단히 노력만 하며 살아오진 않았다. 나는 천재인가, 노력파인가. 나는 누군가. 그런데 웹소설 아카데미에서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여러 생각이 실타래처럼 들다가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뒤죽박죽 정리도 안 된 머릿속에서 일단 한마디 내뱉었다.


A) 저는 반반 섞였다고 생각합니다.


치킨도 아니고 반반이라니. 나는 이미 내뱉은 첫 문장을 수습하기 위해 애드리브로 뒷내용을 채웠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면접관들 앞에 쫘르르 놓여있는 '그램' 노트북들이 선명하게 기억날 뿐. 이상하게도 면접관들은 전부 그램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PPL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튼 의외의 질문에 나는 대사를 까먹은 배우처럼 즉흥 대답으로 대처했다. 내가 답할 때마다 '그램?' '그램?' 되묻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면접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나를 제외한 면접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닥치고 합격 시켜줘요'라는 말을 곧장 내뱉을 수도 없고.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합격하고 싶었기에 패기 섞인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대박 작품 하나 만들어서, 저랑 회사 모두 떼돈 벌게 해드리겠습니다.


할지 말지 망설여질 땐 그냥 하라 그랬던가. 나는 면접 때 한 내 마지막 말이 자랑스럽다. 내 태도와 하고자 하는 욕구 등을 보여주는 한마디였다고 생각한다. 예상보다 치열했던 면접이 끝났고 터덜터덜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웹소설 아카데미는 들어가는 것도 빡세다고. 그리고 며칠 뒤, 면접 결과가 나왔다. 


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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