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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 Mar 12. 2024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못내 나를 사랑하지는 못했다(1)

공포형-회피애착 유형의 연애 에세이

연애 1년차, 하지만 여전히 불안합니다.




스물 여섯, 사랑하기에 꽃다운 나이에 나는 그저 불안했다. 분명 내겐 1년 남짓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를 사랑해주는 엄마도 있었으며, 한 달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연락하는 아버지도 있는데다가, 그들 모두가 나의 꿈을 응원해줄 정도로 나를 사랑해주었지만. 나는 불안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보통 외동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응석받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가정교육 때문에, 아니, 사실은 가정'환경' 때문에. 나는 철이 든 아이로 자라야 했다. 떼를 쓰지 않아야 했고, 성숙하게 굴어야 했으며, 이해심과 배려심으로 똘똘 뭉친 자랑스러운 아이가 되어야 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나는 자라났지만 그 탓에 나는 연기력이 늘었다. 남들을 이해해주는 척 하느라 정작 나는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과, 남들을 배려해주는 척 하느라 정작 나는 배려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 속은 점점 문드러져갔다. 그렇게 '척'만 하는 내게 진짜 친구가 있을 리는 만무했고, 그렇게 나는 점차 단단하게 혼자가 되어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에 올 때까지. 나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고독의 요인에는 나의 부적응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정에 문제가 조금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거짓말로 점철된 부모님의 별거는 결국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식이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혼까지 이어졌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기로 했고, 아버지는 적은 짐을 챙겨 '우리집'을 떠났다. 엄마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나는 그런 엄마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자식이라는 이유로 엄마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즐거운 대학 생활에 나는 엄마가 집에서 목을 매어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매일 강의가 끝나자마자 칼같이 집으로 향했다. 알바를 핑계로, 제사를 핑계로, 몸이 안 좋아서, 한약을 먹고 있어서, 갖가지 핑계를 대며 모든 술자리에서 도망쳐나왔다. 내가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게 되어갈수록 다행히 엄마는 점차 괜찮아졌고 이전처럼 활발함을 되찾았다. 그 덕에 나는 더더욱 고독한 어른이 되었다.


그 고독을 씹던 내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당시 선배A일 뿐이었던 현재의 남자친구는 나에게 나름 대시를 해왔으나,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게 된 내가 한 대답은 "안 돼요."였다.


싫어요, 도 아니고 안 돼요, 라니. 그 때의 나는 선배를 다시는 보지 않을 마음으로 내 상황을 전부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고,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셔서, 내가 빨리 집에 가야한다. 엄마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누군가와 만날 수가 없다. 그럴 여유가 내겐 없다.


돌아보면 참 맹랑한 스무 살이었다. 알게 된 지 3개월도 안 된 선배에게 가정사를 훌훌 이야기해버리면서 고백을 거절하다니. 그런 나만큼이나 남자친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 얘기를 들으면 선배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라는 태도로 모든 가정사를 털어놓은 내게 당시 내겐 선배A일 뿐이었던 남자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기다릴게."


상황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겠다, 내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보겠다. 나보다 고작 두 살밖에 많지 않은 남자친구는 애어른스러운 대답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자존감이 한창 바닥을 친 가시 돋친 사람일 뿐이어서, "이런 나를 기다려봤자 시간낭비에요. 그냥 선후배 사이로 남아요."라는 말과 함께 선배를 남겨두고 카페를 떠났다. 그리곤 3년간 잠수를 탔다.


선배는 종종 내 생사를 확인하듯, 1년에 한 번씩 연락을 보냈다. 그렇게 다섯 번의 연락 끝에, 5년의 시간 동안 엄마가 많이 괜찮아져서, 그리고 이제는 우습게도 내가 힘들어져서. 나는 기댈 곳을 찾았다. 지금의 남자친구가 내게 다섯 번째 안부 인사를 전했을 때에 나는 덥석 그를 붙잡았다. 다시 만나요, 나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울면서 전화를 했다. 남자친구는 당시 운전 중이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대로 선배는 우리 동네 카페로 찾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이 나를 대했다. 만지면 부서지랴 툭 하면 깨지랴 나를 어화둥둥하면서 시간은 금세 1년이 지났다. 아버지가 나간 자리에는 남자친구가 대신 자리해주었다. 집 전등이 나가면 말 하지 않아도 남자친구가 와서 고쳐주었고, 조립 가구가 오면 뚝딱 완성시켜주고, 데이트가 끝나면 밤길이 어둡다며 항상 집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능청스럽게 엄마 밥을 얻어먹으며 남자친구는 그렇게 우리 집에 식었던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남자친구는 참 고맙고, 든든하고, 엄마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애가 지속될수록 나는 불안했다. 우울했고, 슬펐으며, 데이트가 끝나는 밤마다 흐느끼며 울었다. 이런 남자가 나를 왜 사랑할까, 어째서 희생을 자처하는 걸까. 내 어디가 좋아서? 난 예쁘지도 않고 집안에도 문제가 있는 데다가 돈도 없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데. 사랑받을 이유가 없는 나를 사랑해주는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가 가져다 준 행복이 금세 달아날까 나는 불안했다.



그렇게 연애 1년차, 불안의 끝에 내게 찾아온 건 공황장애와 선택적 거식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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