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양 Jan 24. 2020

The Color Of Life

[Modern Black : 012]

Modern Black : 012

어떤 기억은 오래됐지만 아직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이 불 켜진 상태로 방안은 널브러져 있고 현관이 열린 텅 빈 집.

도둑이 들었나 당황하기를 잠깐, 

으레 있었던 일인 듯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어느 병원인지를 확인한다.

대학병원의 응급실은 생사를 다투는 환자들과 그 곁을 지키는 보호자들,

연일 강행되는 교대근무와 업무량으로 지치고 날카로운 톤의 의사들과 간호사,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그것들이 한데 뒤섞여 응급환자의 성명과 병실 호수를 확인하려던 찰나,

중환자실이라는 청천벽력의 말에 

정신을 놓을 새도 없이 전화를 돌린다.

‘네, 00 병원 응급실이에요. 수속을 해야 하니 바로 와주세요.’

가족이 응급실에 실려가는 것은 연례행사 중 하나지만

중환자실이라는 말에 하루도 안되어 형제 친척들이 모였다.

아픈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같은 공간 안에서 한쪽에서는 생사를 다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장례 및 유산 분배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다.

거기에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뒤틀린 욕망,

어떤 것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무력감,

네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같은 성을 가진 이방인,

그럼에도 살겠다는 강한 의지로 2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난 유일한 가족.

.

.

.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건

그 속의 아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살아왔던 나날들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꺼냈을 때의

어떤 위로도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직접 겪지 않은 이상 누구도 그 당시의 내 심정을 절대 알지 못할 테니까.

무감각 속 오랫동안 내재되어 있던 분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할 바엔,

나 혼자 감당하면 되는 부분들이었으니까.

.

.

.

더 이상 어떤 것도 보지 않고 

그저 관찰자의 시점으로만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의사와 환자가 아닌 그 순간만큼은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을 보여주시고 다가와주셨던 선생님을 계기로

그때부터 조금씩 내 삶의 풍경은 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리석고 무지했던 건 

내가 보고 겪은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아집에 빠진 나를 바로 세우고

누구도 해주지 못했던 스스로를 안아주는 것.

백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포옹이 그리웠던 그 시절의 나 자신.

2020년 경자년에는

더욱 커다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 미양(美量)

이전 10화 The Color Of Lif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