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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원이샘 Aug 20. 2024

우당탕탕 국악 입시

이쪽 문이 닫히면, 저쪽 문이 열리나니

1) 2022년 10월 어느 날. 가야금 2대를 싣고 A대학교로 서둘렀다. 근무했던 곳에 해당 대학까지 1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촉박한 감이 없지 않다 있다. 시험은 2시였다. 그런데 주차하고 입실하려니 발길이 안 떨어진다.


"무슨 영광을 누리려고, 갑자기 대학원에 가고 싶었을까."


웃기다. 원서 접수 날, 가슴 떨려하면 인적사항을 세심하게 적었던 것. 실기 비중이 압도적이지만, 면접에 일말의 가산점을 얻기 위해 얼렁뚱땅 국악개론 책을 대출했던 것. 나에게 영감을 준 책의 특정 대목을 인용하며 자기소개서와 학업 계획서를 살뜰히 썼던 것. 5,000원짜리 청심환을 가볍게 사 먹으려 했으나, 효과 직빵인 안정액 권유에 갑절이나 비싼 약을 샀던 것.


이 모든 것은 대학원 입학에 진심이었던 나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당일 날, 그간의 노력이 발산했던 희망은 바래고 두려움이 날 감쌌다.


오른손에 *법금을,  왼손에 *산조 가야금을 들고 대기실에 입실했다. 떨린다. 심장이 너무 쿵쾅된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부생들인가?' 서로 살갑게 얘기를 나눈다. 손도 안 풀린다. 긴장된다. 가야금 응시생들을 세본다. '많네.. 근데 소리는 왜 이렇게 맑고 좋은 거야..' 분위기에 숨이 막힌다.

*법금: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의 가실왕이 만들었다는 12줄의 현악기. 그러나 미추왕(262~283) 릉에서 발견된 토우 장식 항아리를 바탕으로 가야금은 이미 3세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토우 장식 장경호' 중 가야금의 모습
*산조 가야금: 19세기 '산조'라는 음악 장르가 등장하면서 법금을 개량하여 빠른 연주가 가능하도록 제작한 악기. 민요나 산조와 같은 민속악을 연주할 때 사용된다.


비싸게 산 안정액 효과가 상당했다. '비싼 값을 하는군.' 그런데 이걸 어쩌나. 대기 시간이 상당하다 보니, 약 효과도 미미해졌다. 수험번호가 불리고 실기시험장 앞에서 대기한다. 손에 땀이 난다. 손이 끈적하면 되던 것도 안 된다. 법금으로 정악 곡 중 *군악 軍樂을 연주했다. 군악은 상대적으로 템포가 빠르고 연주 초반에 *안족을 옮겨 제6번 줄(E♭)을 태太(F)로 높이고, 제5번 줄(E♭)을 남㑲(C)으로 낮춰야 했다. 서양 음악에 비유하자면 연주 도중에 조옮김을 해야 했던 것.


*이후에도 중仲(A♭)을 고(G)로 낮추고, 무無(D♭)를 남南(C)으로 낮춰야 한다.

*안족: '기러기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족雁足이라 부른다. 가야금 줄을 받치고 있는 장치이며, 오른손 쪽으로 움직이면 음정이 올라가고, 왼쪽으로 내리면 음정이 내려간다.
법금(정악가야금)과 '현악영산회상' 중 '군악' 첫대목. 가야 할 길이 막막하다.

  저런. 태太 음정이 높았다. 상황 파악이 되는 그 찰나에 손과 머리가 얼어버린다. 결국 죽을 쑤었다. 연주를 중단하라는 종소리가 울린다. 살얼음을 걷는 듯한 연주는 끊기고 곧바로 법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산조 가야금을 오른쪽 무릎에 얹었다.


  산조는 기악 독주곡의 한 형태다. 연주자의 기량을 산조를 듣고 가늠할 수 있다. 진양조('빠르기'이자, 악장을 의미함)에서 시작하여 점점 빨라진다. *싸랭. 진양조 첫소리가 이렇다. 이 소리만으로도 어느 정도 전투력이 측정된다. 특히 느린 곡은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정신 단디 차려도 어려운 것을 첫 실수가 유발한 여진餘震으로 인해 이 곡도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싸랭: 옥타브 음을 간발의 차를 두고 소리 내는 것을 구음으로 나타낸 것
산조 가야금과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 중 진양조 첫 장단


1분이 지나고 종소리가 울린다. 띵띵. "자진모리 해보세요."


자진모리. '자주 몰다'라는 문장에 뿌리를 둔 단어. 다른 장단에 비해 빠른 곡이다. 자진모리는 흥겨움을 준다. 그런데 이미 얼어버리고, 수틀렸다는 생각에 자진모리 역시 엉망진창으로 몰았다.

산조 가야금과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 중 자진모리 첫대목부터 다섯 장단

실기곡을 길게 듣지 않으신다. 여타의 대학도 그럴 테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으로도 충분히 연주자의 역량이 가늠된다. 실기 평가 후 이어지는 질문.


"25현 가야금 할 줄 알아요?"


예중, 예고 여부는 차치하고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질문이다. 비록 입시곡에 25현 연주곡은 없었지만, 25현을 해 본 적 없는 가야금 전공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나는 교육학 전공이었기에 저 질문은 타당하다. 그것도 너무나도.


거짓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솔직하게 답했다. 산조 가야금만큼 잘 다루지 못한다고. 믿었던 산조 가야금마저 날 배반했기에 내 답변이 우스꽝스러워졌다. 다른 질문도 몇 가지 받았던 것 같지만,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 발표가 있던 날. '불합격'이 붉게 적혀 있었다.


2) 23년 5월. A대학원에 또 원서를 접수했다. 약간의 광기와 오기가 날 휩쌌던 것 같다. 졸업 예정 학생들이 응시하지 않기에 대기실에 있는 학생 역시 압도적으로 적었다. 가야금 응시자는 나 혼자였다! '작년보다는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 회로를 돌리고 대기실에 들어간다.


금방 내 차례가 왔고, 실기장에 들어섰다. 교수님들도 그대로셨다. 앉은자리며, 곡을 끊는 타이밍마저. 나 역시 처음에 응시했던 곡을 그대로 연주했다. 같아야 하는 것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그러나 다른 것까지 같아버리니 난처해졌다. 22년에 보여줬던 연주 역량 그대로, 벌벌 떠는 모습 그대로, 당황한 모습 그대로. 두 번째 응시한 면접 내용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충격적이었으니까.


"학생이 가지고 있는 열정은 진짜 높이 사요.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보여준 모습으로는 우리 대학원 커리큘럼을 따라오기 힘들 것 같아요. 혹시 국악 이론 전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학업 계획서에 보여준 글을 보면 오히려 이쪽으로 연구해 보는 것이 탁월할 것 같은데."


그리고 바로 꼬리를 물고 따라온 이 말.


"(...)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모습으로는 '대학원 과정'은  힘들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다. 모의고사나 수능처럼 긴 시간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허리가 몹시 아팠다. 천근 같은 긴장감이 허리를 매섭게 짓눌러서일까. 이 날도 그랬다. 부모님은 당연히 합격할 줄 알으셨단다. 두 번 떨어지는 내 모습을 보고 할 말은 많으셨겠지만, 하지 않으셨다.


아픈 허리를 달래며 집으로 돌아가는 날, 그리고 시험 이후 일상을 여전히 이어가던 중,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자주 마음속에 울려댔다.


"'대학 과정'은 힘들어요."


주어와 서술어가 긴밀하게 호응할 때, 둘 중 하나에 간섭하면 다른 한쪽이 심하게 흔들린다. 나는 주어의 다섯 음절 중 하나를 빼버리기로 한다.


"그럼 '대학 과정'은? 대학원이 힘들다고 했지, 대학은 언급도 없었잖아?" 그리하여 현실을 인정하고 노선을 변경한다.


3) 23년 9월. 여러 학교 편입학 요강을 두루 살펴본 후, 고려했던 것은 2가지였다. 첫째, 이미 외운 곡으로 응시 가능한 곳일 것. 직장과 병행하여 새로운 곡을 준비하기 버거웠다. 둘째, 응시 가능한 날짜여야 할 것. 출근일에 대뜸 편입 시험을 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두 조건 모두에 부합하는 학교가 딱 1곳이 있었으니. 바로 B대학교 국악과. 기한에 맞춰 제출 서류를 우편으로 제출하고 실기 시험일을 확인했다. 24년도 1월 15일.


4) 24년 1월 13일. 누나 집에 가야금 2대를 챙겨 갔다. 누나가 묻는다.


"대뜸 왜 가야금 2대? 무슨 일 있어?"

"아, 선생님이 같이 공연하자 하시네. 1월 15일 이날."

"그런 거였어? 거추장스럽게 2대나?"

"에이, 그럴 일이 있어."


편입 시험에 응시한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별 일도 아닐뿐더러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불합격 소식을 전하는 게 왜 이리도 민망한가. 여하튼 그 감정이 썩 유쾌한 것이 아닌지라 나의 기이한 행동을 묻는 누나에게 저렇게 답했다.


시험 당일, 가야금 2대를 싣고 B대학교로 향한다. 서울길이 서툴러 느긋하게 출발했다. 이날 하늘이 참 쾌청했다. 느낌 탓인가. '군악'은 그간의 경험으로 위험 부담이 상당했다. 그래서 템포가 느린 '하현도드리'를 연주했다. 산조는 여느 때처럼 진양조부터 시작했다. 곡의 완성 여부를 떠나 그냥 탔다. 내가 잘하려고 해 봤자 갑자기 명인의 소리가 되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잘하려는 마음이 근육을 경직시켰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 그저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기억난다. 시험도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해가 서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남쪽에 더 가까웠다.


"넉넉히 3시간 잡아도 해 지기 전에 도착하겠군. 좋아 좋아." 누나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느꼈던 유쾌함이 지금도 선명하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5) 24년 2월 2일. '합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좋은 것도 잠시, 여러 상황을 돌아보고 나니 과연 등록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모아둔 돈도 입시 준비한다고 다 써버렸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기쁨과 걱정의 전환이 이렇게 빠르다니.) 직장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휴직 허가를 받았다. 학자금도 매우 싼 이율로 대출받을 수 있으니 검소하게 살면 2년은 충분히 버티겠다 싶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대학원 입학의 문이 막히자 얼떨결에 예상치 못한 2회 차 학부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시작해도 한참 늦게 시작한 음악을, 돈을 벌어다 주기는커녕 있는 돈도 거둬가는 음악을 하고 싶었을까. 왜 하필 가야금인가. 어떤 씨앗이 마음속에 배양되고 배양되어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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