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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원샘 Oct 03. 2024

왜 금제를 밟고 싶을까

영생을 바란 누메노르의 멸망

  '금'을 긋는 것은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금제 禁制도 그렇다. 소리가 같다. 기능도 같다. 자유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를 바쳤다. 그러나 자유가 과잉이 되면 인간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한계는 일종의 닻이다. 폭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는 존재의 가장 내밀한 충동이 아주 고집스럽게 추구하고 얻고자 했던 것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버렸던 것이다. 그건 처음에는 꿈이요 행복이었지만, 나중에는 쓰라린 운명이 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 때문에 몰락하고, 돈을 가진 자는 돈 때문에, 굴종하는 자는 굴종 때문에, 쾌락을 좇는 자는 쾌락 때문에 몰락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황야의 이리도 그의 자유 때문에 몰락하였다. 그는 목적을 이루었다.

-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p. 67 -


 

  요정은 영생을 살기 때문에 인간의 필멸이 부러웠고, 인간은 필멸하기 때문에 요정의 영생을 바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 바라던 선물이 내 것이 되는 순간 기쁨은 달아난다.

Each species yearns to have the gift of the other, but would not like it if once achieved.

- Poul Kocher, 'Master of Middle-earth' p. 111 -


  요정과 함께 모르고스를 타도한 인간 Edain은 발라의 은총으로 수명이 세 배로 늘어났다. 불사의 땅 아만 Aman과 중간계 사이의 안도르 섬을 선사받아 화려한 문명을 구축한다. 이들이 바로 누메노르인이다. '반지의 제왕' 아라곤이 바로 누메노르의 후손이며, 젊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87세다.

- 피터 잭슨, 2002,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


  강대한 누메노르인들은 한순간에 멸망한다. 아라곤은 누메노르에서 망명한 자의 후손이다. 그의 조상은 왜 중간계로 망명하였는가. 사우론의 계략으로 누메노르 왕 아르파라존이 금제를 어긴다. '절대 불사의 땅을 향하지 말 것'. 사우론이 타락하기 전의 이름은 '마이론'. '훌륭한 자'였다. 어떤 동물보다 지혜로웠던 뱀이 이브를 기만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듯, 사우론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 아르파라존을 속여 아만 Aman으로 군대를 이끌고 출항토록 한다. "아만의 땅에 불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소."


  누메노르인들은 아만을 밟는다. 금제를 밟았다. 유일자, 에루가 현현하여 누메노르 섬을 바다에 가라앉힌다. 이브와 아담은 금제를 어긴 대가로 낙원에서 쫓겨난다. 사우론의 계략을 짐작했던 충실한 누메노르인들만이 섬이 가라앉기 전, 중간계로 망명한다. 이들의 수장이 엘렌딜, 곤도르와 아르노르 두 왕국의 건국자다. 당시 누메노르에 있던 사우론은 재앙을 피하지 못해 아름다운 육체를 잃고 영혼인 채 중간계로 돌아온다.

- 피터 잭슨, 2001,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 사우론에 대항하기 위한 '최후의 동맹 전쟁' 중 엘렌딜

  


  악은 그 자체의 것이 아니다. 창조된 질서 안에서 내재된 현존의 감소다.

  Evil is not a thing in itself but a lessening of the Being inherent in the created order.

- Poul Kocher,  'Master of Middle-earth' p. 72 -


  모르고스, 사우론, 나즈굴. 이들은 애초에 악하게 창조된 자들이 아니다. 선한 존재들이었다. 다만, 타고난 능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랐다. 축복받은 누메노르인들 역시 많은 것을 누린 이였다. 모르고스를 축출하는데 받아 마땅한 축복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영생을 바란다. 주어진 것을 외면하니 금제를 넘어서면서 현존을 느낀다.


  현존. '살아 있음'에 집중하는 것은 어렵다. 잘 까먹게 된다.(남에게 하는 말이 아닌,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나의 정신을 외부에 쏟아야 마땅한 사회라 그렇다.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말은 Psyche다. 그러나 다른 뜻도 있으니 바로 '숨'이다. 이를 라틴어로 Anima로 불리는데, 곧 정신이다. 숨은 정신이다. 공교롭게도 에로스 Eros의 배우자는 프시케다. 사랑과 숨(정신)은 짝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프뉴마(πνεύμα Pneuma) 역시 숨이요, 영혼 그리고 본질을 의미한다.


  금제를 어기지 않고 현존을 느끼는 방법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자들은 예외 없이 숨을 쉬는 자들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호흡한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구나!' 이것이 축복이자 정수 精髓요, 모든 것이다. 다른 것을 우선하느라 주어진 선물을 잊은 이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들이마 쉴 때의 부풀어 오름. 내쉴 때의 이완을 음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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