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두억시니에 관하여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수 있는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는 다음을 증명했다. '한국 문화와 풍토가 가미된 환상 작품이 가히 아름다울 수 있구나'. 톨킨이 엘프와 난쟁이가 중간계를 누비도록 했다면, 이영도는 나가와 레콘, 도깨비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네 종족은 신의 선민 選民들이다. 신의 가호가 그들과 함께 한다. 각자 나름대로 신과 관계 맺는다. 종족별 신을 일컫는 말도 존재한다. 그러나 두억시니들은 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모습은 기형적이다. 생김새와 어순이 정상을 벗어난다. 그 기원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오만' 때문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사모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이상한 니름을 닐렀다.
<이웃을 바라볼 창문을 값진 주렴으로 덮고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을 잃고 찾아 헤매니, 이를 지혜로움이라 불렀더라. 저 오만한 두억시니>
<누가 한 니름이죠?>
<니름이 아니라 노래야.>
<노래……요?>
<그래. 내가 거론한 건 중간 부분이고,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어. 남겨진 수명을 헤는 일도 두렵고 썩어 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르는 짓도 포기한 지 오래. ……>
- 이영도,『눈물을 마시는 새』P.303 -
*니르다: 나가들이 목소리를 쓰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선악과를 먹고 분별할 수 있게 됐으나, 낙원에서 추방당한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타락 墮落이었다. 천상에서 대지로의 곤두박질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분별한다. 똑똑하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지나치나, 주렴으로 창을 가리 듯 인식하기 어렵다. 둘러볼 겨를이 없다.
인간의 타락으로 상황은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제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책임지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곁을 떠난 인간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내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매튜 D. 커크패트릭, 『쇠얀 키에르 케고어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p. 16 -
니체는 우리가 살신자 殺神者라 부르짖었다. 스펀지로 지평선을 지우듯, 우리는 신을 지워버렸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키에르 케고르는 우리가 신의 곁을 떠남으로써 내면의 현기증을 느끼며, '어지러운 자유 the dizziness of freedom'를 안고 살아간단다.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받침대 halt 없이는 자유도 없다.'
낙원에서의 추방. 살신. 이는 정체성의 상실이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들린 말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우리가 신의 자녀임을 잊고 있다. 자본이 제1 가치가 된 지금, 우리의 신성을 느끼기 힘들다. 자본에 집착하며 고통받는다. 인간이 두억시니 같다. 눈으로 보기에 비슷한 모습을 취했으나, 네 선민이 두억시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듯이, 서로를 이해 못 할 때가 많다. 때로는 증오하고 죽기를 바란다 惡之慾其死.
당장 교회나 절에 가라는 말이 아니다. 돈을 버리고 이슬만 먹고 사시라는 말도 결코 아니다. 의식주의 해결을 넘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우리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 신의 자녀다. 신성하다. 두억시니들은 과연 그들의 신을 찾을 수 있을까. 신형철 평론가의 말로 끝을 갈음한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 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 신형철, 『인생의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