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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좋아하는 연습

by 화정

여름옷을 정리하는 일은 늘 서운하다. 하얀 블라우스와 다양한 색감의 원피스를 보기만 해도 여름의 뜨겁고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데 이제 박스에 넣어 두려 한다. 일 년이 지나야 꺼내 입을 수 있겠지.


시월에 접어들고 한차례 비가 지나고 나니 쌀쌀한 바람이 코에 감돈다. 차가운 바람결로 찾아오는 가을은 약간의 쓸쓸함이 있다.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절정이 지났기 때문이고, 12월 일 년의 끝자락을 달리기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면 금방 겨울이 올 텐데, 얼굴이 얼얼해질 정도로 추운 겨울이 머지않았기에 귀를 덮을 수 있는 두툼한 털모자를 떠올리며 마음의 월동준비를 먼저 한다.





일상에도 사계절이 있다. 봄과 같이 온화하고 편안한 시기, 여름처럼 뜨겁게 집중하는 시기, 가을처럼 무언가를 이루는 시기 그리고 겨울처럼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시기도 있다.


올해의 상반기가 내게 겨울이었다. 업무는 늘어나고, 사람 관계와 일 처리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체력이 금방 바닥이 났다. 정신도 과부하인지 평소엔 잘 가지고 다니는 지갑을 지하철 좌석에 두고 내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버스를 내리면서 지갑을 바닥에 떨어뜨려 한참을 찾아야 했다. 주말이면 몸이 무거워 침실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쉬어도 쉬는 기분은 아니었다. 긴 터널 속에서 얼마큼 가야 출구가 있을지 안 보이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말에 열리는 축제에 같이 가자는 말과 함께. 나는 여전히 겨울 같았지만 세상은 봄이었다. 행사장에는 사람들로 활기찼고 음악이 가득했다. 중앙 무대에서는 가수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저녁이 되어 조명이 켜지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라이브로 보는 즐거움이 이런 거였지' 스탠딩 좌석에서 오랜만에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건강한 도파민이 샘솟았고 생기가 돌았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였다. 검은 배경에 팡팡 불꽃이 터지는 아름다운 장면은 오분 가까이 이어졌다. 날씨는 온화했고 음악의 여운이 남아있는 순간, 먼 하늘의 불꽃을 바라보며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축제 같은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를. 모든 게 힘든 것 같아도 그게 전부는 아니야.

너를 기억해서 연락해 준 친구, 위로가 된 음악, 마음껏 웃었던 오늘처럼.

인생이 매일 축제일 순 없어도 즐거운 일은 언제나 있어."


그래 인생이 매일 축제처럼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겠지. 그렇다고 우울하게 머물러만 있으면 내 손해. 그 안에서 작게라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버티듯 보내지 말고 내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폭죽처럼 떠오른 밤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계절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나"


계절마다 나를 움직이는 온도가 다르다. 여름의 기운은 유난히 잘 맞는다. 시원한 수박, 복스러운 복숭아, 화사한 옷차림, 해가 늦게 지는 긴 밤. 그 모든 게 여름의 기쁨이다. 하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몸은 움츠러들고 마음도 쉬이 게을러지고 만다. 그런 겨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겨울을 지나기만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일면의 사분의 일은 그냥 흘려보내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장점을 찾고, 그 안에서 따뜻함을 발견하는 법을.


다음 계절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의 계절을 충분히 살아보자. 현재에 흐름을 맡기며 지금의 계절을 사랑하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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