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해버렸던 날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짜릿하다

by 프니

올 1월, 노인분들에게 컴퓨터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은 수업 첫날이었다. 짧은 자기소개를 마치고 수업을 시작하려 할 때,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내가 이렇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없었다. 그래서 질문 하나하나에 답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무래도 첫 시간부터 수업하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으니까.


"선생님, 왜 한 달만 가르치세요?"

"선생님 어디 사세요."

"선생님 혹시 몇 살이세요?"


하지만, 곧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15:1의 대결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자세하게 나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저는 서른두 살이고요, 경기도 ㅇㅇ에서 왔고, 여기까지 오는데 버스 2번 갈아탔어요. 근데 고속도로 타니까 30분도 안 걸리더라고요? 아, 제가 사정이 있어서 일단 한 달만 하기로 한 거고..."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뭐요? 서른두 살이라고요?"

"네, 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여러 명이 소리쳤다.

"뭐요? 결혼을 했다고요?

강의실은 더 이상 강의실이 아니었고, 곧 나의 청문회장으로 변했다. 말도 안된다,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냐면서 대뜸 내게 물었다. 생각지 못한 압박 질문에 나는 "죄송합니다, 작년에 했어요"하고 허허 웃어버렸다. 물론, 고등학교 때나 썼을법한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을 하지 않는 민낯에, 틴트 정도 바르고, 일자 앞머리에 목을 넘지 않는 머리를 하고 있으니 그도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결혼을 한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나? 왜 나는 스스로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나를 소개하였는가? 집으로 돌아오는 좌석버스 창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저 사람(나)은, 저 사람만은! 당연히 미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의 말을 하니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의미 없던 말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날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였는데. 왼쪽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본 어느 사람은, 남자 친구분 있으신가 보다~라고 했다. "아뇨, 남편인데요."라고 하니 또 헉소리를 내셨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외적인 모습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물론, 이런 일은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이 정도면 32살의 어른답지 못하게 생긴 나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어른다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사실, 어릴 때도 꾸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면 조금 멋도 부릴 줄 아는 도시 여자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브라운관에 나오는 동갑내기 인물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어른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외관이라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20대를 함께 한 소프트렌즈는 더 이상 내 눈에서 받아주지 못하고, 렌즈를 못 끼니 눈 화장도 할 필요가 없으며, 예쁜 옷보다는 돌아다니기 편한 옷을 선호하는 나를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맺었다. 나는 그냥 이게 나니까.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짜릿하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아기보살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애기가 보살이라고 불리다니, 참 웃픈 상황이었지만 그 단어 말고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는 게 엄마의 변명이었다. 이유는, 잠깐 울다가도 수건과 젖병만 쥐어주면 몇 시간이고 보채지 않고, 울지 않으니 순하고, 참하다 하여 아기보살이라는 별명을 지었다고 했다. 그렇게 착하디 착해서, 사춘기도 스무스하게 넘어가 엄마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던 나, 나는 더 이상 아기보살이 아닌 속세의 인간이 돼버렸다.


대학생이 된 후로, 엄마의 말과 반대로 가기 시작했다. 휴학을 원하는 나와, 칼 졸업을 원하는 엄마의 대립은 회사를 가서도 이어졌다. 퇴사를 원하는 나와, 안정을 원하는 엄마. 한 번은 엄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속 안 썩이더니, 뒷북이다 뒷북이야."라고. 늘, 엄마의 기대와 생각대로 잘 자라주었던 내가 엄마의 생각과는 반대의 길로 가려고 하니 당혹스럽기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를 짜릿한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바라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내가 원하는 나의 현실적인 모습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낸 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반전의, 반전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나는 반전의 반전으로 살고 있다. 잘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돈은 더 적게 벌고 있는 반전, 서른둘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눈두덩이에 섀도우를 바를 줄 모르는 반전, 이미지는 비혼 주의를 지향할 것 같으면서도 가족 중에 가장 빨리 결혼한 반전, 엄마 말은 잘 듣는 효녀일 것 같으면서도 나만의 길을 가는 반전.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또 다른 반전카드를 손에 쥔 채로,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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