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퇴사 후 남은 한 잔

한잔에서 한 잔으로

by 무엇이든 씁니다

출근하자마자 빈 속에 모닝커피를 드링킹 한다. 잠을 깨는 의식이다. 커피는 몸에 빠르게 흡수되어 아직 메롱 상태인 나의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며 부팅을 시작한다. 아침잠이 많아서 학교 다닐 때 매일 지각하는 날 보면서 엄마가 한 걱정을 했었다. 저렇게 잠이 많아서 어디 회사 출근해서 일은 할 수 있겠느냐고. 아유 엄마, 걱정 마세요. 저에겐 커피가 있잖아요~~!! 그렇게 커피는 나의 오피스 메이트가 되었다.


커피 한 잔에 일하는 사람이 된다. 첫 커피 직후 가장 집중이 잘 되고, 일의 효율이 높다(고 느낀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급한 일부터 후다닥 헤치우고 잠시 브레이크. 나에게 브레이크 타임 is 커피 타임.


내가 다닌 회사들은 죄다 회의가 많았다. 낮에는 회의하느라 일할 시간이 없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길어질 게 뻔한 회의에 커피는 필수품. 회의가 길어지면 커피는 식어간다. 식어빠진 커피는 회의주의자에게 어울린다.


야근에는 커피가 애인 같은 존재다. 커피와 함께면 외롭지가 않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어도 커피만 있으면 밤을 꼴딱 새울 수 있다. 커피는 낮 시간 동안 잔뜩 긴장했던 심신을 풀어주는 신경 안정제 역할을 하면서 졸음도 쫓는다.


그렇게 커피를 드링킹 드링킹 하다 보면 하루에 10잔씩 마실 때도 있었다. 그 정도면 커피 중독(남용)에 가깝다. 그렇게 커피에 기대어 살다가 퇴사 후 각성제, 자양강장제, 신경 안정제로서의 커피와는 결별했고, 커피 한 잔이 살아남았다. 임신과 수유할 때도 나의 모성애는 커피 한 잔의 벽은 넘어서지 못했으니까, 죽을 때까지 그 어떤 위협도 커피 한 잔은 지켜낼 것이다.


하루에 한 잔만 마시는 커피다 보니까 언제, 어디에서 마실 지를 매우 고심하게 된다. 어떨 때는 일어나자마자 마시기도 하고, 어떨 때는 딸이 학교 가자마자 식탁에 앉아 창밖을 보며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산책하고 와서, 때로는 모닝 샤워하고 나서 테라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에 마신다. 오늘은 산책하고 와서 찬물로 샤워하고 장마 중 잠깐 나오신 햇빛에 머리 말리려고 테라스에 나와서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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