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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 없는 ‘다 심겠어’병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by 김효원

텃밭 농사를 시작한 후 덜컥 '다 심겠어'병에 걸렸다. 이 병으로 말씀드리자면, 뭐든 내 텃밭에 다 심고 싶어 지는 병으로 한번 걸리면 약도 없다는 불치병이다.


마트에 가서 딸기가 보이면 가격을 살펴보다가 "으아아 뭐가 이리 비싸" 하면서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텃밭에 심어 먹어야겠다"라고 결심하는 것이다.

올해 심으려고 모아둔 꽃씨들. 사진=김효원

올겨울 유난히 비쌌던 시금치를 살 때도 그랬다. 김밥에 시금치를 듬뿍 넣어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역시 시금치도 내 밭에 심어야 실컷 먹을 수 있겠네" 했다.


지난해 가을 배추 농사에 성공하고 나서는 올해는 100포기로 물량을 대폭 늘리기로 마음 먹었다. 배추 농사 짓느라 노심초사했던 건 다 잊었다.


최근에 텃밭에 심고 싶은 품목으로 새롭게 넣은 채소가 있으니, 브로콜리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 브로콜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튼튼한 기둥을 가지고 있는데 브로콜리니는 가늘가늘한 줄기가 특징이다. 그렇기에 기둥을 떼고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물처럼 먹을 수 있다.


농사 카페에서는 농한기를 맞은 회원들이 지난가을 거둬들인 씨앗을 갈무리해 나눔 한다. 씨앗 나눔글이 올라오면 자동반사적으로 손을 들고 만다. 나눔 하는 씨앗만 보면 손을 번쩍 드는 '저요 저요'병이다.


모시, 방풍나물, 조선대파, 호박 등 먹을 수 있는 채소 씨앗은 물론 붓꽃, 파초, 봉숭아꽃, 해바라기 등 꽃씨까지 나의 텃밭에 없는 채소와 꽃 씨앗에 손을 번쩍번쩍 든 결과 '밭이 모자를 정도'로 많은 씨앗을 보유하게 됐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뒷산을 자꾸자꾸 개간해 밭을 늘렸다. 왜 그러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밭을 줄여야 놀면 놀면 농사를 지으실 텐데 자꾸자꾸 밭을 늘리면 일이 늘 텐데 왜 저러실까.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밭이 부족한데 뒷산으로 진출해 볼까?

일년의 농사 플랜을 진지하게 세우고 있다. 사진=김효원

'심고 보자'병도 생겼다. 귤을 먹다가 씨앗이 나와도 심고, 아보카도 씨앗도 심고, 토마토 씨앗도 흙에 묻어놓고 본다.


씨앗을 심을 때 열매를 반드시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이 발아해 잎이 나고 잎이 크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먹고 남은 토마토 씨앗을 심었더니 토마토가 무성하게 자랐다. 사진=김효원

요즘 서울의 집에는 토마토가 한창 자라고 있다. 마트에서 사다 먹고 나온 토마토 씨앗을 심은 결과다. 햇빛이 부족해 키만 껑충 컸다. 토마토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리 없는데 화초 삼아 키우는 중이다.


토마토는 잎을 손으로 문지르면 풋풋한 향이 난다. 토마토 잎이 겨울철 삭막한 내 거실을 생기 있게 만들어준다. 그것으로도 토마토 씨앗을 화분에 묻어둔 보람이 차고 넘친다.


'다 심겠어'병, '저요 저요'병, '심고 보자'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공원에서 떨어진 씨앗을 주워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엊그제는 동백나무 씨앗을 주워다 심었다. 솔방울을 심으면 소나무가 나올까 궁금해 슬쩍 심어 본다.


베란다도 없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세 가지 병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쯤 되니 광화문 한복판에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하셨던 화가 김점선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돈을 벌면 광화문 한복판 빌딩을 사서 싹 밀어버리고 그 땅에 농사를 짓겠노라고 하셨다. 그 프로젝트가 너무 기대돼 우리는 선생님이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광화문 한복판에 빌딩을 사시길 기다렸는데, 슬프게도 하늘나라로 일찍 떠나셨다.


나는 광화문 한복판은 아니더라도 서울의 어느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는 꿈을 꾼다. 빌딩을 부수지 않더라도 자그마한 마당이 남아있는 허름한 집을 사서 채소와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고 싶다. 가끔 친구들을 불러 한아름 꽃을 따서 안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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