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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2촌 후 가장 좋아하게 된 단어, 노지월동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by 김효원 Mar 03. 2025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의 세계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보라. 그이는 요즘 자신의 최대 관심사를 언어로 쏟아낼 것이다. 나 역시 요즘 나의 관심사를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 결국 우리의 대화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관심 없는 단어가 화제에 오를 확률은 거의 없다.


말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하더라도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이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다.

바싹 말라있는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김효원바싹 말라있는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김효원

5도 2촌 텃밭러가 된 후 내가 하는 말의 상당 부분은 농사 얘기다. 얼마전 수영에 빠진 후배와 대화를 하는데, 후배가 하는 수영 얘기를 듣다가 내가 농사 얘기를 하고, 내 농사 얘기를 듣다가 후배가 수영 얘기를 했다.


요즘 가장 좋아하게 된 단어는 ‘노지월동’이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써본 기억이 없는 단어인데, 지금은 텃밭의 농작물을 선택하는 절대 기준이 됐다.


노지월동. 사전에 적힌 풀이를 그대로 적어보면 ‘식물이 노지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한 번 심어두면 다음에 또다시 심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결실을 보고 싶은 게으름뱅이 텃밭러에게 가장 매력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노지월동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한 해 살이 채소야 노지월동과 무관하지만 한 자리에서 피고 지고 또 피며 살아가야 하는 꽃이나 나무는 노지월동이 되어야만 강원도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마당이 생기면 제일 먼저 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나무가 있다. 이름도 청순가련한 배롱나무(목백일홍나무)다. 선운사에 간 적이 있다. 선운사 마당에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분홍색꽃도 꽃이려니와 수형은 또 얼마나 멋있던지 이런 나무를 내 집 마당에 심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배롱나무를 사서 심으려던 야심은 그러나 수포로 돌아갔다. 배롱나무는 노지월동이 어려운 나무라고 한다. 유난히 혹한인 강원도 날씨를 견디기 어렵다고 하니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고 말았다.


배롱나무를 심겠다는 야심이 무산된 후 나무를 살 때 “노지월동 되나요“라는 질문이 자동발사적으로 나왔다. 노지월동 된다는 말만 들으면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사과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체리나무, 호두나무 등은 노지월동하지만 감나무는 노지월동이 어렵다.

딸기 잎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면서 시들시들해지지만 결코 죽지는 않는다. 사진=김효원딸기 잎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면서 시들시들해지지만 결코 죽지는 않는다. 사진=김효원

딸기도 대표적인 내한성 식물이다. 딸기는 추운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고 살아있다가 봄이 되면 새잎을 틔우며 성장한다. 딸기는 이름으로 보나 열매의 생김과 맛으로 보나 공주처럼 떠받들어줘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무던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니 기특하다.


한번 심어놓으면 알아서 월동하고 다음 해에 또다시 자라나 꽃을 피우는 꽃씨도 다양하게 모아두고 있다. 조금씩 심어두면 알아서 꽃대궐을 만들어주겠지 생각하면 로또라도 사 주머니에 넣어둔 듯 웃음이 절로 나온다.


’ 노지월동+다년생‘의 대명사로 가장 먼저 선택할 꽃은 작약이었다. 지난해 초봄 작약 종근을 구입해 텃밭 가장자리에 심었다. 이 작약이 올봄에 어떤 꽃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에 차있다.


차이브, 붓꽃, 큰 꽃 으아리, 낮달맞이꽃, 백일홍, 메리골드, 샤스타데이지, 접시꽃, 꽃양귀비, 봉숭아, 쑥부쟁이, 매발톱, 사계국화, 은방울꽃 등도 한 번 심어두면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이 나오는 효자 식물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씨앗을 수집하며 텃밭에 심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3월 중순이면 시군 단위 산림조합이 운영하는 나무시장이 개장한다. 나무시장에 가면 각종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나와 “나를 데려가세요” 하며 줄지어 서있다. 과소비하면서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나무시장이다.


올 봄에는 어떤 나무를 들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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