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서울에서야 방앗간 갈 일이 없지만 시골에서는 다르다. 시골에서 방앗간은 일 년에 열 번쯤은 가게 되는 매우 중요한 장소다.
비록 낡고 허름하고 칠이 벗겨졌을지언정 방앗간 기계들은 여전히 탈탈탈 잘 돌아가며 척척척 맡은 일을 해낸다.
주천은 우리 시골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십리길을 걸어 장 구경을 가서는 짜장면을 얻어먹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생필품을 사려면 산을 하나 넘어 주천 읍내로 가야 한다.
주천 읍내에는 방앗간이 대여섯 개나 남아있다. 다방도 대여섯 개가 있어서 다방 숫자와 방앗간 숫자가 연동되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방앗간은 심지어 영업도 꽤 잘 돼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올망졸망 보따리를 늘어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아주머니들로 평상이 가득 차있다.
방앗간에는 노란 장판을 씌운 평상이 반드시 있다. 평상밑에 전기를 넣어 겨울이면 뜨끈하게 궁둥이를 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일종의 서비스다. 방앗간에 맡긴 공정이 끝나려면 한 시간 이상이 걸리니까 보따리를 내려놓고는 평상에 궁둥이를 디밀고 눌러앉는 것이다.
방앗간이 하는 일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한 축은 떡, 또 다른 한 축은 기름.
떡방아 기계가 땀 닦을 시간도 없이 부리나케 일을 하는 시기는 일 년에 두 차례. 민족최대 명절이라고 이름 붙은 설 가래떡 시즌과 추석 송편 시즌이다.
TV에서는 설에도 민족최대 명절, 추석에도 민족최대 명절이라고 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짜 민족최대명절인지는 알기 어렵다. 설 파와 추석 파가 대결해 1, 2위를 판가름해 논란을 종식시켜 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순위가 결정되는 것을 양쪽 다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명절 대목에 다른 방아거리를 가지고 갔다가는 퇴짜 맞기 십상이다. 방앗간 주인은 줄 지어 서있는 떡방아 거리 때문에 다른 방아를 돌릴 손이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뜨거운 가래떡이 줄줄줄 뽑아져 찬물 담아놓은 대야로 쌓이는 것을 보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 방앗간 주인은 마치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달인처럼 척척척 뽑고 자르고 쌓는다.
떡집에 가서 만들어놓은 가래떡을 사도 되지만, 굳이 방앗간에 쌀을 가져다 부려놓고 떡을 뽑는 것은 떡집 주인의 기술을 보는 재미 때문이다. 방금 뽑은 가래떡을 한 줄 뜯어 뜨끈할 때 먹는 재미는 두 번째다.
추석 송편 시즌에는 집에서 씻어 불린 맵쌀을 방앗간에 가져가 보드랍게 빻아 가지고 오면 된다. 빻아온 쌀가루를 반죽해 식구들과 둘러앉아 설탕이나 밤, 콩 등을 넣어 모양 껏 빚으면 송편이 된다.
요즘에는 집에서 송편 하는 집이 드물어 방앗간이 송편까지 만들어 쪄서 판다. 그러다 보니 추석에는 송편 빚어 찌느라 방앗간 사람들이 밤을 새야 하는 지경이다. 우리 집은 “그래도 추석에는 둘러앉아 송편을 빚어야 명절 같지"라며 어김없이 쌀가루를 빻으러 방앗간에 간다.
설 가래떡과 추석 송편이 짧고 굵게 몰아친다면 방앗간이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기름 짜는 일이 아닐까 싶다. 기름을 금방 짜서 먹는 것은 농사짓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농사지은 참깨나 들깨를 가지고 방앗간에 가면 한 시간도 채 기다리지 않아 고소한 기름을 받아 나올 수 있다.
과거에는 깨를 짜러 가기 전 엄마가 미리 깨를 잘 씻어 말렸지만 요즘은 방앗간에서 깨를 씻어 볶아 짜주는 논스톱 서비스를 해주기 때문에 깨를 씻지 않고 가져가도 돼 편리하다.
방앗간마다 깨를 짜는 비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리 집이 단골로 가는 방앗간이 휴업이라 다른 방앗간을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들기름 한 말을 짜는 공임이 1000원 차이가 났다. 1000원 때문에 단골집을 바꿀까 말까 고민했으니 1000원의 위력은 여전히 세다.
들깨가 담긴 자루를 내려놓고 평상에 앉아 커피믹스를 타서 마시면서 옆자리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주머니들은 만나자마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강원도 특유의 사투리가 쏟아지기 때문에 강원도에 있다는 실감이 난다.
연기가 펄펄 날 때까지 볶은 깨를 압착해 기름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면 사장님은 느릿느릿 걸어와 기계 앞에 앉아 기름을 소분할 준비를 한다. 기름을 담을 병은 소주병이다. 집에서 소주병을 미처 챙겨 오지 못했다면 방앗간이 판매하는 기름병에 담아 달라고 하면 된다. 방앗간 기름병은 한 개 500원이다.
병뚜껑은 두 가지 컬러다. 빨간 뚜껑은 참기름, 노란 뚜껑은 들기름이다. 소비자들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색을 선정한 기름병 제조업체 사장님의 센스에 감탄한다.
방앗간 사장님은 느릿느릿 걸어오던 그 사람이 맞나 싶게 재빠른 손으로 기름을 소주병에 담은 후 뚜껑을 닫는다. 고무망치로 뚜껑을 땅땅 내려치는 것으로 공정은 마무리된다.
들깨 한 말을 짜는 공임은 1만 2000원이다. 한 말을 짜면 들기름이 6~7병 정도 나온다. 한 병에 2000원에 들기름을 얻은 셈이라고 좋아한다. 들깨 한 말을 농사짓기 위해 들인 비용은 애써 잊어야 한다.
방앗간에서는 들기름을 짜서 한 병씩 구매할 수 있게 판매하고 있다. 한 병에 1만 7000원~2만 원에 판매하니까 비싼 가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농사지은 깨로 방금 짠 들기름을 가슴에 품은 뿌듯함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 기름 한 병에는 내가 여름내 들인 시간과 노력과 애정이 담겼기 때문이다.
떡이나 기름이 아니더라도 방앗간에서 방아가 돌아갈 일은 무궁무진 많다. 볶은 콩을 콩가루로 빻아주기도 하고, 두부콩을 갈아주거나, 밤 껍데기를 까주기도 한다.
김장철에는 고춧가루를 빻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선다. 고추는 주로 가을에 수확해 말리기 때문에 10월, 11월이 고춧가루를 빻는 대목이다. 고춧가루는 고운 정도에 따라 김장용과 고추장용으로 나뉜다. 더 보드랍게 빻아야 고추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용도를 말해야 한다.
쉴 새 없이 바쁜 방앗간 사장님 내외를 보면서 시골 방앗간이 오래오래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