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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가 엉기는 시간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by 김효원 Feb 10. 2025

콩 딴 김에 두부를 만들었다. 내가 아니고 엄마가.


우리 엄마 1942년생 이춘자 여사는 서울살이 4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강원도 심심산골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신다.

콩을 여덟시간 가량 불린 후 믹서에 간 다음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끓어 넘치려고 하면 찬물을 부어 가라앉혀야 한다. 사진=김효원콩을 여덟시간 가량 불린 후 믹서에 간 다음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끓어 넘치려고 하면 찬물을 부어 가라앉혀야 한다. 사진=김효원

음식은 뭐든 내 손으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신 터라 엄마 모시고 외식 한번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엄마는 지금도 만두를 만들겠다고 하면 먼저 콩부터 물에 담가 두부부터 만든다. 콩을 불려 갈고 끓이다가 콩물을 걸러 간수를 넣어 응고시키기까지 그 번거로운 과정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수행한다.


지난해 가을 추수한 서리태(검정콩)가 넉넉해 엄마는 올겨울 자주 두부를 만들었다.


시골에서는 가마솥이 있어 두부 만들기가 수월하다. 콩을 반나절 정도 불린 다음 믹서에 갈아준다. 한창 두부를 자주 해 먹던 시절에는 업소용 믹서기가 있었는데 그 믹서기가 고장 난 후에는 가정용 믹서기뿐이라 콩을 가는 일에 손이 많이 간다.


간 콩을 가마솥에 넣고 불을 때 끓인다. 바닥이 눌어붙어 타지 않게 나무 주걱으로 자주 저어주면서 거품이 생기면 걷어낸다.

간 콩을 가마솥에서 잘 끓인 다음 자루에 넣어 콩물을 짜낸다. 사진=김효원간 콩을 가마솥에서 잘 끓인 다음 자루에 넣어 콩물을 짜낸다. 사진=김효원

잘 끓여낸 간 콩은 자루에 담고 콩물을 짠다. 짜낸 콩물을 가마솥에 붓고 약한 불로 가열해 끓인다. 여기에 간수를 살살 부어주면 콩물의 단백질이 엉겨 순두부가 된다. 뭉친 순두부를 퍼내 두부틀에 붓고 눌러주면 두부가 완성된다.


갓 만든 두부는 아직 따뜻할 때 손으로 뚝뚝 뜯어 간장을 찍어먹는 게 가장 맛있다. 두부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고소한 맛이 30% 정도는 줄어든 기분이 든다.

끓는 콩물에 간수를 넣으면 몽글몽글 엉기면서 두부가 된다. 사진=김효원끓는 콩물에 간수를 넣으면 몽글몽글 엉기면서 두부가 된다. 사진=김효원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곁눈으로 지켜보면서 가장 신기한 순간은 간수에 콩물이 엉기는 때다.


마알간 콩물이다가 간수를 만나면 바로 반응한다. 액체가 고체로 바뀌어야 콩물은 두부가 된다. 여기에 없어서는 안 될 매개체가 간수다.


간수가 없으면 콩물은 엉기지 않지만 콩물 역시 간수를 만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있어야만 한다.


어떤 일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요소들을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되새기게 된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콩물이다 싶어도 심장을 달궈가며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엄마가 집에서 두부를 하면 나는 두부보다 비지에 더 군침을 흘린다. 콩물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 비지는 생으로 먹어도 좋지만 띄웠다가 먹으면 그 맛이 깊고 풍부하다.


비지는 베로 만든 자루에 담아 구들방이나 전기장판 위에 올려두고 담요를 덮어 이틀 정도 띄운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지가 발효되는 콤콤한 냄새가 난다.


띄운 비지는 어른의 맛이 난다. 생비지가 고소하고 가벼운 맛이라면, 띄운 비지는 산전수전 다 겪은 깊은 맛이 난다. 어릴 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맛인데, 언제부턴가 띄운 비지를 찾아서 먹게 됐다.


생비지찌개를 파는 식당은 종종 만날 수 있지만 띄운 비지찌개를 파는 식당은 드물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공짜로 가져가라고 내놓는 곳은 몇 번 보았다.


요즘은 엄마도 내가 비지장이 먹고 싶다고 졸라야 비지를 띄운다. 엄마는 비지장보다는 청국장 파다.


띄운 비지로 끓인 찌개를 고향에서는 '비지장'이라고 불렀다. 장(醬)이라는 글자는 간장, 된장, 고추장처럼 간을 더해주는 양념 종류에 붙는다. 비지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비지에 소금을 넣어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한 데서 유래했다.


비지가 발음이 영어의 비지(busy)와 같아서 “엄마 요새 비지 하신가요, 비지를 안 해주시네”라고 말장난을 하곤 한다.


노래교실 출석하느라 비지한 이춘자 여사님! 비지장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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